재일학도의용군주요 참전전투 및 전적지

01 인천상륙작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로 수행된 상륙작전으로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서울을 3일 만에 함락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전진한 적의 공격 기세를 저지하기 위해 맥아더는 북한군 후방에 상륙하여 그들의 병참선을 차단하는 상륙작전을 제안한다. 처음에 미 해군은 인천항의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6.9m이며, 만조 시가 아니면 대형 함선의 기동이 불가능하고, 항구 전면에 월미도가 버티고 있어 월미도 점령과 인천항 상륙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들어 이 작전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러한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극적이고도 논리적인 연설에 설득되어 8월 28일 미 합참본부는 이를 승인하고 적극 지원하기로 하였다. 이에 동해 삼척과 서해 군산 근처에서 상륙작전으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북한은 낙동강 전선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느라 인천 방어에 대한 추가적인 자재 지원이나 인원 증원은 없는 상태였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함정 약 260척과 75,000명의 인원이 동원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먼저 상륙작전 1단계로 15일 2시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팔미도 등대불의 인도를 받아 인천수로에 진입했다. 5시에 항모 함재기들이 월미도와 인천에 대한 상륙폭격을 시행하였으며 상륙부대는 7척의 상륙주정에 옮겨 탄 다음 6시 33분에 월미도 해안에 상륙해 섬 내부 소탕에 들어갔다. 이를 후속해 미군 전차 10대가 작전에 가담했다. 그리고 2단계로 16시 45분에 2차 상륙부대가 상륙주정에 올라탔고 17시 32분과 33분에 제1해병연대와 제5해병연대 본대가 목표 해안에 상륙했다. 양 연대는 북한군의 저항을 받았으나 큰 손실 없이 해안상륙에 성공했다. 상륙 첫날밤까지 13,000명이 상륙했고 많은 보급품의 양륙이 이루어졌다. 미군은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만을 기록한 채 완벽한 기습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냈다. 상륙작전의 성공을 발판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9월 16일부터 서울을 향해 진격하여 9월 27일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에 진입해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결국 서울을 수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재일학도의용군은 이러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유엔군으로 참전했다. 최초 상륙부대인 미 제1해병사단의 후속 상륙부대인 미 7사단에 배속된 78명의 재일학도의용군 1진들은 일본을 떠나 16일 인천 앞바다에 도착한 후 9월 17일 상륙주정을 통해 성공적으로 인천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2진 266명 또한 9월 24일 인천 올림푸스 호텔 주변 해변에 상륙하여 본격적으로 6·25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02 원산·이원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난 후 맥아더 사령관은 원산에서 또 다른 상륙작전을 구상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동부 전선에서 퇴각하는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적을 섬멸시키고 평양을 협공하기 위한 원산상륙작전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10월 20일 미 제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키기로 하고 인천항과 부산항에서 상륙작전 준비에 착수했다.

한편 국군 제1군단 예하 3사단과 수도사단은 성공적인 작전수행으로 양양에서 원산 일대까지 신속하게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원산의 전략적, 전술적 중요성 때문에 북한군이 각지의 패잔병들을 합류시켜 완강하게 원산을 사수하려 했지만, 결국 10월 10일 새벽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의 협동공격으로 원산 비행장 일대의 북한군 방어선이 격파되고 국군이 원산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원산상륙작전은 사실상 행정적인 상륙작전이 되었다.

그러나 원산상륙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적은 인천에서 기습을 당한 이후 30명의 소련 기술진을 불러들여 10월 4일에 이르기까지 원산 수역에 약 3,000개의 고성능 기뢰를 설치해두었다. 유엔군은 이 사실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으나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미 함정 3척이 원산 앞바다에서 대파되자 제거작업, 즉 소해작전에 착수할 것을 결정했다. 10월 10일부터 시작된 이 해군사상 최대의 소해작전에는 미 함정 10척, 일본 함정 8척, 한국 함정 1척 등 모두 21척의 함정들이 투입되었다. 작전 도중 미 함정 2척과 한국 함정 1척은 기뢰에 걸려 가라앉고 말았으며 북쪽 호도반도에서 날아오는 적의 방해 포격으로 숱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큰 어려움이 뒤따랐다. 다행히도 국군이 원산을 일찍 점령하여 해변에 있는 지뢰를 제거해 주었고, 10월 17일에는 호도반도의 잔적들마저 휩쓸어 버려서 인원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현지 주민들을 접촉하여 정확한 기뢰 매설 위치에 대한 정보까지 구한 다음에야 10월 25일 오후 완전히 기뢰를 제거할 수 있었다. 무려 2주간에 걸친 소해작전 후 26일에 이르러서야 미군은 상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원산상륙작전은 소해작전 이후에는 아군의 피해가 없는 행정적인 상륙작전에 그쳤지만 동해의 제해권과 제공권 장악을 확고히 해주었고 소련과 북한의 내륙병참선을 차단하는 등 전략적으로 주요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육로로는 수송이 불가능한 보급품이 원활히 지급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해군은 원산 앞바다 소해가 끝난 후 흥남 앞바다 기뢰까지 제거하여 흥남항을 보급기지로 삼을 수 있었다.

한편 당초 원산상륙작전에 참가하기로 한 미 7사단은 열흘 동안을 부산 앞바다에 떠 있다가 27일에 가서야 항해를 개시했는데, 원래의 계획을 바꾸어 국군이 이미 휩쓸고 지나간 이원으로 올라가 29일 그곳에 상륙한 다음, 맥아더 원수의 새로운 명령에 따라 혜산진을 향해 북상하게 되었다.

재일학도의용군 중에서는 3진 101명을 비롯하여 약 120여명이 미 7사단에 배속되어 이원에 상륙하였으며 카투사 군번을 받은 4진 52명은 미 3사단에 소속되어 원산에 상륙한 후 북진에 참가하였다.

03 풍산·갑산·혜산진 탈환

1950년 11월 21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승기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이 38선 돌파와 원산상륙작전 등으로 북진을 계속할 때 미 제10군단 예하 7사단 소속 17연대가 진격을 계속하여 풍산을 지나 갑산과 혜산진에서 북한군 패잔병 집단을 격퇴하고 혜산진을 탈환한 전투를 말한다.

동부전선에서는 11월말까지 국경선을 향한 진격이 계속되었다. 서부전선에서는 유엔군이 11월 1일을 고비로 중공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2일과 3일에 거쳐 청천강 선으로 총철수가 실시되었으나 동부전선에서는 미 제7해병연대가 수동 부근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치르면서 장진호를 향해 계속 진격하고 있었다. 동 연대는 장진호 서안을 따라 북진을 계속하여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가 개시되던 11월 말 유담리 일대까지 진출해 있었다. 또한 이 무렵 미 7사단의 31연대 3대대와 32연대 1대대도 장진호 동쪽 신흥리 일대까지 진출하여 중공군과 접전하고 있었고, 함경북도의 중심지인 청진항을 점령한 후 회령을 향해 진격하던 한국군 수도사단도 부령, 수성동 및 부거 일대에 진출해 있었다. 그리고 미 7사단 17연대는 11월 21일에 혜산진에 도착하였으며 9일 후에는 국군 3사단 22연대도 혜산진에 돌입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전투에서 미 17연대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돌파해야 하는 지형적 악조건과 눈으로 뒤덮인 협곡을 뚫고 나가야 하는 고난을 극복하며 계속 전진한 끝에 혜산진을 무혈로 탈환하였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한국전쟁이 곧 종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차게 되었고, 특히 유엔군은 맥아더가 약속한 대로 크리스마스 이전에 귀국하여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낸다는 환상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중공군의 대대적인 참전으로 인해 통일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11월 30일 미 제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전선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어 동북부 전선에서 철수한다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아군은 두만강을 눈앞에 두고 다음날 흥남을 향해 철수해야만 했으며, 통일의 염원을 끝내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혜산진으로의 북진 당시 미 7사단 17연대에는 재일학도의용군 박진우, 이주만, 채창수 외 수십 명이 배속되어 있었고 31연대에도 박만수, 우지식, 이득용 외에 많은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미 7사단에 배속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군번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1개 소대에 한두 명씩 분산 배치된 상태로 이원에 상륙한 후 후퇴하는 적의 뒤를 쫓아 풍산으로 진격했다. 이 후 이들은 갑산을 지나 11월 21일 아침 혜산진을 점령하는 감격을 누렸으나 삼수를 목전에 앞둔 지점에서 중공군의 반격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04 장진호 전투

장진호는 함경남도 개마고원 위를 흐르는 압록강 지류인 장진강을 막아 조성한 인공호수이다. 장진호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일간 미 제1해병사단이 이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 제9병단을 상대로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접전을 벌이며 결국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까지 후퇴한 작전을 말한다.

평양수복 이후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는 전제 하에 압록강을 향한 대대적인 포위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극동 사령부는 한반도 북부의 험난한 자연과 기후, 그리고 중국군의 개입에 대한 철저한 대비 없이 이 포위작전의 주공을 미 제1해병사단에게 맡겼다. 미 제1해병사단은 유엔군의 북진에 맞추어 서부전선 부대와 접촉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진호 방면 진출을 위해 원산에 상륙한 후 장진호 쪽으로 북상하게 된다.

그러나 장진호 북방으로 이동하던 부대는 중공군 제9병단 소속의 8개 사단이 형성한 포위망에 막혀 진출이 저지되고 말았고, 이후 방향을 바꿔 약 2주간의 험난한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한반도 북부의 험준한 산악지역과 혹독한 날씨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유담리로부터 진흥리에 이르는 약 40km의 험준한 계곡지대에 걸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까지 철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12월 11일에 최종 집결지에 도착한 미 해병사단은 전사 718명, 부상 3,504명, 실종 192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으며, 미군 전쟁사에도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철수작전을 통해서 미군과 국군은 12만에 달하는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킴으로써 군인과 피란민 등 약 20만 명을 무사히 남쪽으로 철수시킬 수 있었다. 또한 중공군 제9병단은 이 전투에서 전사 2,500명, 부상 12,500명 가량의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어 약 4개월 동안 부대를 재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이 2주간 지연되었고 1950년 12월 말 시작된 3차 공세에서도 전체적인 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 일대에서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진호 전투에는 미 3사단과 7사단에 배속되어 북진을 하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참전하였다. 특히 미 7사단에는 재일학도의용군 청년들이 다른 단위부대보다 훨씬 더 많은 120여 명 가량 배속되어 있었는데, 이원상륙 후 계속해서 이어진 북진과 장진호 전투를 치르면서 이들 중 무려 83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들은 흥남까지 이어진 처절한 철수작전에서 군번도 받지 못한 채로 젊은 목숨을 바치고 말았다.

05 흥남철수작전

1950년 12월 중공군 개입 이후 미 해병사단이 흥남까지 후퇴를 완료하자 유엔군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흥남항에서 수행한 대대적인 해상 철수작전이다. 1950년 12월 12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되었다.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인해 12월 6일 미 8군이 평양을 내어주고 38선으로 철수하자 흥남 일대로 모여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적진에 고립된 상황이 되었고, 12월 8일 맥아더 장군은 해상철수를 지시하게 된다. 작전을 총지휘한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은 흥남항을 통해 아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는 동안 퇴조항-함흥-동천리를 연결하는 반경 12km에 교두보를 설치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흥남 앞 바다에는 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을 배치하여 중공군의 공격으로부터 설정된 통제선을 화력으로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하였다. 또한 109척의 수송선을 동원하여 병력 105,000명, 차량 17,500대, 35만 톤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12월 12일부터 15일까지 미 제1해병사단, 17일 국군 수도사단, 21일 미 7사단, 24일 미 3사단이 흥남을 떠나자 당일 14시 30분 유엔군이 항만을 폭파시켰고 이로써 흥남철수 작전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특히 철수작전 동안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끊임없이 모여드는 피난민들을 안전하게 해상으로 수송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함으로써 무려 91,000여명의 피난민 철수를 도왔다. 따라서 흥남철수작전은 단지 군사적인 측면에서 성공한 철수작전을 넘어 인도주의적 작전으로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세계 전쟁사상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해상철수작전이었다.

흥남철수작전에는 북진에 가담했다가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아 흥남까지 철수하는 데 성공한 미 3사단과 7사단 소속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참가했다. 이들 중 일부는 경북 포항으로, 일부는 부산으로 철수를 하였고, 부대 재편성 후 미군 또는 국군에 편입하여 계속해서 전투를 치르게 된다.

06 임진강 전투

1951년 1월 1일 신정에 이루어진 중공군 제3차 공세인 신정공세 중 임진강 일대에서 국군 1사단이 치른 방어작전이다. 1950년 12월 31일 황혼 무렵부터 중공군 6개 군과 북한군 3개 군단은 38도선 전선에서 대공세를 시작했다. 임진강 하류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1사단은 엄청난 규모의 적을 맞아 분투했지만 적의 도하를 저지하지 못했다. 서울 전방 연천, 포천과 강원도 홍천, 인제에서도 이날 밤 적군은 아군의 방어선을 뚫고 진격해왔다.

이 중공군 신정공세는 모택동의 전략적 판단에 의해 취해졌다. 그는 유엔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대패한 뒤 미국이 유엔군 철수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모택동은 38도선에서 유엔군이 방어선을 강화하기 전에 다시 한 번의 공세로 충격을 가하고 서울을 점령한다면 미국 내에서 철수 주장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기대했다. 이에 중공군 총사령관은 1950년 12월 22일 공세를 결정하고 계획을 확정했다. 그는 철저하게 미군을 피하고 전투력이 약한 국군 사단들에게 공격을 겨누었다.

12월 31일 17시에 갑작스런 포격과 함께 6배 이상으로 우세한 적의 공격을 받은 국군 1사단 12연대 전방 대대들은 중공군의 저돌적 도하를 저지하지 못하고 후방으로 철수했다. 12연대는 후방 예비대대를 동원해 후퇴하는 우군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며 공격해온 적에게 큰 손실을 입혔으나 인접한 부대들에서도 중공군의 돌파가 이루어져 더 이상의 방어가 어려웠다. 1월 1일 날이 밝은 후 유엔군은 항공폭격과 포격으로 적의 전진을 잠시 저지했지만 신임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서울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백선엽 1사단장은 비통한 심정으로 서울을 뒤로 한 채 사단을 한강 남안으로 철수시켰다. 이승만 대통령과 서울 시민들의 서울 사수 희망에도 불구하고 결국 리지웨이 사령관은 1월 2일 서울 철수를 결심하고 군부대들에게 철수작전을 개시하도록 명했다. 이로써 서울시민들은 1월 3일부터 영하 15도가 넘는 혹한 속에서 고난의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하게 박혀 잊혀지지 않는 1·4후퇴가 이렇게 이루어졌다.

1·4후퇴 후 재반격 작전에 나선 아군은 1951년 3월 중순 서울을 탈환한 데 이어 북진을 계속한다. 그리고 3월 31일 새벽 국군 1사단이 기습적으로 임진강 도하작전을 벌여 적군을 격파함으로써 개전 초기의 패배를 설욕했다. 이후 51년 중공군 4월 공세로 다시 임진강 유역을 상실했지만, 국군과 유엔군의 6월 반격작전으로 다시 이를 회복해 임진강의 푸른 물결을 지켜낼 수 있었다.

국군 1사단이 서울 서북방 쪽 임진강 유역에서 중공군과 밀고 밀리는 혈전을 벌이고 있을 당시 국군 1사단에는 재일학도의용군 출신 김재진, 김진수, 배명암, 송동원, 신영옥, 심재연, 정상옥, 홍경학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1사단의 수색대, 의무대 등에 배속되어 한국말이 서투름에도 목숨을 걸고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07 임진강-서울서북방 전투 (중동부 춘계공세 작전)

1951년 중공군 4월 공세 중 국군 1사단이 재치있는 방어작전을 통해 서울 서북방을 성공적으로 사수한 전투로서 4월 23일부터 30일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을 군사적인 승패가 아닌 정치적 타협에 의해 종결시키기로 한 정책 결정에 따라 유엔군은 임진강 하구에서 화천 저수지를 지나 양양으로 이어지는 캔자스 선을 확보하고 철원-금화-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방어 가능한 휴전선을 확보하려 했다. 이와 같은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자 중공군과 북한군은 그들의 병력을 4월 21일까지 공격대기 지점으로 집결시켜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공산군은 중공군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을 투입하여 국군 1사단을 격멸하고 서울로 진격하여 이를 노동절 선물로 모택동에게 바치기로 작정했다. 이에 대해 미 8군은 캔자스 선을 고수하느라 출혈을 강요당하지 않고 미리 계획된 통제선으로 철수하면서 공산군 측에 최대한의 출혈을 안긴 후에 다시 반격작전을 수행하여 캔자스 선을 회복한다는 작전을 설정하였다.

1951년 4월 23일 새벽 중공군은 고랑포에서 도하 공격을 감행했다. 또한 24일 저녁에는 북한군이 임진강 철교를 도하하여 사단 좌측 11연대를 공격했다. 국군 1사단은 우측이 노출된 상태에서 서울 가까이로 전선을 축소해가면서 방어에 임하여 사령부를 서대문에 설치하고 서울 서북방의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4월 28일에는 미 제1군단 전 사단이 서울 방어전에 투입됨에 따라 국군 1사단은 아현동 교차로-홍은동 북쪽-불광동-노고산을 연결하는 선에 주 저항진지를 구축하고 서울 서북방을 지켰다. 공격해오던 공산군은 아군의 적절한 전선조정과 막강한 화력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아 29일 공세를 멈추었다. 아군은 적절한 부대교체와 예비대 투입 등으로 방어선을 유지하면서 차후 반격을 위한 전력을 보전하여, 5월 7일 봉일천에서 북한군 제1군단의 주력을 격멸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당시 국군 1사단에 11연대 1대대 2중대 소대장으로 배속되어 있던 이상봉을 비롯하여 여러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일주일동안 쉬지 않고 계속된 공방전 끝에 결국은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고랑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08 매봉-한석산 전투

1951년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치러진 전투로 국군 9사단 30연대 2대대장 김진동 중령의 적절한 타이밍과 적의 허를 찌르는 작전 지휘로 승리를 거둔 성공적인 야간 공격작전을 말한다.

현리계곡과 인제 사이의 고지대를 통제하는 한석산은 이 일대의 최고봉으로 이곳을 장악하면 소양강과 인제를 모두 감제할 수 있는 요지였고 한석산 남쪽 주능선의 일부인 매봉은 한석산을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주요 고지였다. 4월 25일 3사단 22연대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받은 9사단 30연대는 공격을 개시해 적의 4월 공세 때 3사단이 상실한 매봉과 한석산을 탈취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30연대장 손희선 대령은 이 어려운 임무를 작전의 귀재인 김진동 중령의 3대대에 맡겼다.

5월 7일 공격의 선봉은 11중대가 맡았다. 11중대는 아침에 자욱하게 낀 안개를 이용하여 910고지 하단의 868고지 부근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안개가 걷힐 무렵 868고지에 도달한 11중대와 9·10중대는 적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수류탄 공격에 의한 피해가 컸다. 대대장은 11중대의 손실을 감안해 9·10중대를 초월 공격케 하여 910고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후 북한군이 매봉과 서측방의 850고지에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역습을 가하여 5월 8일까지 공격작전은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김진동 중령은 야음을 이용해 10중대에게 856고지를 기습하게 하는 방법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10중대의 기습 공격은 적을 놀라게 했다. 이 상황을 이용해 김진동 중령은 공군 전폭기의 지원 하에 9중대로 하여금 매봉 바로 남쪽의 1010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매봉을 점령한 후 연대장은 5월 10일 1대대와 2대대를 추가로 투입해 주봉인 한석산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결국 17시에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국군 9사단에는 유승호, 김영은, 명덕일, 박덕철, 신효갑, 이완공, 이창진, 장덕준, 최성규 등 많은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특히 30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장으로 부임해 있던 유승호에게 매봉-한석산 전투는 부임 후 처음으로 참가하는 연대 규모 전투였다.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대대는 3대대와 임무교대 후 공격선상에 배치되었고, 유승호가 지휘하는 3소대는 공격의 선두에 나서 고지를 향해 돌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수류탄이 오고가는 속에서 위험한 돌격을 감행한 후 치열한 백병전으로 작전 명령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09 현리 전투

1951년 중공군의 5월 공세 중 중공군과 북한군의 압도적인 집중공격을 받고 국군 3군단이 와해되면서 동부전선에 커다란 돌파구를 허용한 전투이다.

중공군 개입 이후 밀고 밀리던 전선은 1951년 5월에 이르러 한반도 중부전선에 걸쳐 있었다. 중공군은 그해 4월 중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통한 전선돌파로 아군의 전선을 양분하고 서울을 다시 점령하여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엔군과 국군은 설마리 전투에서의 분전과 가평 부근에서의 선전으로 중공군의 기세를 저지하고 전세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에 중공군과 북한군은 주공을 중부에서 동부로 전환하여 공세를 취하였고 중동부 전선의 국군 담당 지역이 북으로 돌출된 것을 이용하여 국군 사단을 섬멸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춘계공세로 불리는 5월의 공세였다.

1951년 5월 16일 16시부터 강력한 준비포격을 신호로 중공군의 대공세는 시작되었다. 1시간여의 준비포격에 이어 보병 부대의 공격이 개시되었으며, 특히 7사단과 5사단 정면에 집중적인 공격이 실시되었다. 다급하게 진행되는 전황 속에서 국군 제3군단은 17일 철수를 결정하고 현리를 거쳐 용포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날 새벽에 유일한 철수로인 오마치(현 오미재) 고개를 점령당하여 퇴로를 차단당한 3사단과 9사단은 제대로 공격도 해보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개별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직적인 철수는 불가능하였고 후퇴 중 모든 장비와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는 양상까지 보였다. 그러나 국군 5사단과 미 2사단의 방어로 해서 북한군의 진출이 저지되면서 더 이상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실시하여 5월 말에 다시 중동부 전선을 회복하였다.

현리 전투는 국군 제3군단의 붕괴라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전투였다. 군단사령부에서조차 2개 사단이 4일 동안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제3군단 사령부는 해체되고 남아있는 제1군단을 비롯한 국군 사단들은 미 8군 사령부에서 직접 지휘·통제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군 사단들의 전반적인 체질 개선 프로그램이 도입되었다. 이후 국군 사단들은 야전훈련소에 입소하여 사격에서부터 대대급 전술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훈련하게 되었고, 장교들의 리더십 향상을 위해 미 보병학교와 포병학교 유학의 기회도 제공되었다. 또한 국군의 화력을 보완하기 위해 포병부대의 증편이 이루어졌다. 결국 현리 전투는 쓰라린 패배와 많은 희생을 통해 국군이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 전환점이 된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육군종합학교 22기를 수료하고 3사단으로 배속된 김성욱, 문성환, 윤용근, 이명규, 이철우, 이활남, 조용갑 등 재일학도의용군들이 현리 전투에 참가했다. ‘현리의 고배’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이들은 며칠 동안을 굶으면서 탈진하여 쓰러져가는 대원들을 일으켜가며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다해 급속행군을 계속해야만 했고, 천신만고 끝에 철수에 성공한 후 부대를 재편성 받아 다시 전투에 복귀하였다.

10 인제지구 전투

1951년 5월 중공군의 공세로 인제와 현리를 맡았던 국군 제3군단이 대패한 이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동부 전선에서 수행한 반격작전이다.

6·25전쟁 당시 인제는 38선 이북 지역으로 북한군 제12사단 주둔지였으나 인천상륙작전 직후 국군이 수복했다가 다시 1·4후퇴로 적군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이후 아군은 중공군의 1951년 2월 공세를 막아내고 반격작전을 벌여 서울을 수복한 뒤 문산-화천-인제-양양으로 이어지는 전선을 구축했다. 이렇게 되자 중공군은 서부 전선을 주공, 중부 전선을 조공으로 하는 4월 공세를 감행하여 재차 서울 점령을 노렸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자 중공군과 북한군은 중동부 전선을 주공으로 하는 5월 공세를 감행했다. 우수한 화력을 지닌 미군이 중심인 서부와 중부전선을 비켜 국군이 지키던 취약지역을 노린 것이다.

중공군 5월 공세로 인제와 현리를 맡았던 국군 제3군단이 대패했고 제1군단의 동부전선도 크게 밀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국군 5사단과 미 2사단의 방어로 해서 북한군의 진출이 저지되면서 더 이상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군 제3군단이 와해되는 쓰라린 패배를 겪은 아군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동부 전선에서 대반격작전을 실시했다. 중공군 5월 공세 직후인 5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간 전개된 반격작전에는 미 2·7사단과 1해병사단, 국군 5·7·8사단, 그리고 정예부대인 미 187공정대까지 참여했다. 결국 아군은 이 반격작전을 통해 5월 공세로 빼앗긴 인제·현리지역을 비롯한 중동부 전선의 실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국군 8사단과 미 7사단에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소속되어 인제지구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중 미 7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박진우는 이 전투에서 총상을 입었고 공병대로 활약한 명덕일, 이완공은 안타깝게 전사하고 말았다.

11 펀치볼지구 전투 (김일성고지지구 전투)

1951년 8월 29일부터 10월 30일까지 서화리, 가칠봉, 피의 능선, 1211고지, 무명고지 등 김일성고지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지구 전투이다. 펀치볼지구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있는 분지의 지명으로 6·25전쟁 때 종군 외국인 기자가 이 분지에 운해가 떠 있는 모습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펀치볼은 포도주에 과일 등을 섞어 만든 ‘펀치’라는 칵테일을 담는 화채 그릇을 말하는데, 이 분지가 마치 펀치볼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곳은 중동부 전선의 통제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를 확보하기 위해 공산군과 국군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는 국군 3·5사단 및 해병 1연대, 미 2·7·25·45사단 및 1해병사단이 참전하였다.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전선을 교착 상태에 빠뜨렸고, 이런 상황에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 간 치열한 전투가 치러지고 있었다. 자연히 펀치볼을 둘러싼 봉우리들은 격전 속에 휘말린다. 1951년 9월에는 펀치볼지구 전투 중 대표적인 1026고지(모택동 고지)와 924고지(김일성 고지) 탈환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 해병 1연대와 미 해병 1사단은 이 고지들을 놓고 북한군 1사단과 피할 수 없는 승부를 가리게 되었고 결국 3주에 이르는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북한군 1사단을 격퇴함으로써 적을 간무봉 방면으로 후퇴시켰고, 해안분지 북쪽의 주요 고지들을 확보하며 작전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밖에도 1211고지를 두고도 9월 5일부터 약 40일간 국군 5사단과 공산군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며 10월 27일부터 31일까지는 1052고지를 탈취하기 위한 3사단 22연대의 작전이 전개되는 등 펀치볼지구 내에서는 2개월에 걸쳐 끊임없이 뺏고 뺏기는 고지 쟁탈전이 이어졌다.

당시 이 펀치볼지구 전투에 참가하였던 국군 3사단과 미 7사단에 재일학도의용군이 소속되어 있었다. 특히 3사단 소속의 김활남은 김일성 고지 재탈환 전투에 참가하여 복부 총상을 입었고, 역시 3사단 소속의 윤용근은 924고지와 1026고지 탈환 전투에 참가했으며 1052고지 전투에서 활약한 공적을 인정받아 금성화랑훈장을 받기도 했다.

12 백마고지 전투

6·25전쟁 기간 중 가장 치열한 고지 쟁탈전으로 해발 395m의 작은 고지를 놓고 국군 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이 공방전을 벌였던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치러졌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위치한 야산으로 전쟁 전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무명고지였으나 1952년 전선이 고착되면서 철의 삼각지를 감제하는 주요 지점으로 유명해졌다. 백마고지라는 지명의 유래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수많은 포탄세례로 산 등이 하얗게 벗겨져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백마가 누워있는 형상처럼 보였다고 해서 이처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백마고지 전투는 오늘날까지 명실 공히 6·25전쟁에서 한국군이 치룬 수많은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중공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열흘간 밤낮으로 12차례에 걸쳐 벌어졌으며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뀐 끝에 국군이 결국 승리했다. 국군 9사단은 전투기간 중 적절한 예비대의 투입 및 부대 교체 등으로 부대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목표 탈취를 위한 투지로 부대 전 장병이 하나로 단결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아군의 강력한 포병 및 항공 지원도 승리의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여 10,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고 국군 사상자는 3,423여 명이었다.

이 승리는 국군에 전술적 우위를 가져다 주었으며 작전의 주도권을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국군은 1951년 초 국군 3군단이 현리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맛본 모든 오욕을 씻어내기 위해 일치단결하였으며, 그 결과 중공군과의 정면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유엔군 지휘관들은 이 전투에서 국군 부대가 중공군 부대를 제압하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국군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즉, 백마고지에서 국군 9사단이 보여준 필사의 전투력은 현대 국군이 세계적인 강군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정신적인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당시 국군 9사단에는 유승호, 김영은, 명덕일, 박덕철, 신효갑, 이완공, 이창진, 장덕준, 최성규 등 많은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배속되어 있었고 제51독립연대 1대대 1중대 소대장으로 있던 윤호태도 이 무렵 9사단으로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중 최성규는 전투에서 공병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점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3 저격능선 전투

6·25전쟁이 진지전으로 변해 교착되던 1952년 중부 전선 금화지역에 배치된 국군 2사단이 중공군 제15군과 맞서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 진지를 빼앗기 위해 공방전을 벌인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진행되었다.

저격능선은 평강을 정점으로 철원과 금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자리 잡은 오성산과 인접한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해발 580m의 무명 능선이다. 이름도 없던 이 무명 능선을 저격능선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1951년 10월 당시 미 25사단이 금화 지역으로 진출해 중공군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허리를 펴거나 일어서기만 하면 중공군이 마치 저격수처럼 사격을 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에서 유래했다. 그때부터 미군들이 이 능선을 ‘스나이퍼 리지(Sniper Ridge)’라 부름으로써 저격능선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 돌무더기 산은 철의 삼각지대 내 중공군의 주요 거점인 오성산에서 국군 2사단의 방어지역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특히 저격능선은 철원과 금화 일대의 중부전선을 위협할 수 있어 아군이 이곳을 점령하면 중공군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따라서 중공군은 저격능선 정면을 방어하고 있는 국군 2사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 2사단 전면에는 중공군 4개 사단이 포진하고 있어 병력이 아군의 수보다 4배나 더 많았다.

본격적인 저격능선 전투는 1952년 10월 14일 개시되었다. 적군의 공격을 감지한 국군은 중공군에 먼저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새벽 5시를 기점으로 공격에 나선 2사단 32연대 3대대는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아 강력하게 저항하는 중공군을 무찌르고 고지를 빼앗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진지 보강과 병력 재배치가 끝나기도 전 중공군 45사단 133연대의 역습을 감당하지 못하고 5시간 만에 저격능선을 다시 적에게 내어주고 만다.

이러한 치열한 공방은 고지 쟁탈전 중 가장 오랜 기간인 43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고지의 주인이 무려 30여 번이나 뒤바뀌었다. 이 전투에서 국군 2사단은실종자 89명을 포함 4,83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중공군은 14,86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저격능선 전투는 어느 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지 못한 채 능선 중앙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반분한 상태에서 끝나고 만다.

당시 국군 2사단에는 재일학도의용군 박덕근이 32연대 수색중대 3소대 분대장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국군에 편입한 그는 거제도포로수용소의 33포로경비대대 2과에 근무하다가 1952년 9월 국군 2사단으로 전속명령을 받았다. 당시 박덕근이 속한 32연대는 저격능선 전투의 주공부대였고 그는 소대장도 없는 상태에서 불과 20여 명밖에 남지 않은 소대원들과 함께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 중공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하였다.

14 금성 전투 (중공군 7·13 대공세)

1953년 7월 13일 휴전협정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시작된 중공군 최후의 공세로 국군 2군단이 일시적으로 붕괴되었으나 곧바로 전세를 가다듬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전선을 안정화시킨 전투이다. 7월 19일까지 계속되었다.

휴전회담의 진행으로 인해 1953년 동계기간 중 계속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전선은 3월에 접어들면서 증가한 중공군의 도발로 잠시 격화되었으나 또다시 4-5월 초까지는 계속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5월 중순이 되자 중공군이 다시 서부와 중부 전선에서 미 8군의 전초기지들에 대한 전면공격을 재개하였다. 특히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군이 관리하고 있던 반공포로들에 대한 대대적인 석방이 단행되자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은 중단되고 전선은 초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한국 정부의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당황한 공산측은 휴전회담 자체를 깨려는 행동은 자제하였으나 전선에서의 활동은 증가하여, 결국 7월 공세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7월경 금성 돌출부에 배치된 국군 4개 사단(3, 6, 8, 수도사단)을 섬멸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유엔군도 공산군 부대 이동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각 군단장에게 방어태세를 강화하도록 경고하고 부대 재배치를 단행하였다.

1953년 7월 13일에 단행된 중공군의 7월 공세는 금성 돌출부 양 측방에서 시작되어 이후 돌출부 정면으로 전환되었다.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운 적의 공격은 14일 더욱 강력해져서 결국 6사단 2연대와 9연대는 퇴로가 차단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철수하기 시작했고 국군 6사단과 8사단은 고지들을 상실하고 금성천 이남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적의 공세를 저지한 아군은 7월 16일 반격작전을 실시하였다. 먼저 국군 11사단의 반격작전이 시작되었고 8사단은 금성천을 목표로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반격작전을 실시한 지 3일 만인 7월 19일에 금성천을 다시 확보하고 반격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6·25전투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된 이 금성전투에서 국군 2군단은 비록 공세 초기에 금성 돌출부를 상실했지만 중공군 5개군 15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하고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펼쳐 잃었던 지역의 절반인 금성천을 회복하고 전투를 끝냈다. 그렇지만 이 전투로 국군 전사자 1,700여명이 발생했고 중공군도 25,000여명이 사망하는 등 휴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양쪽이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금성전투에 참가했던 재일학도의용군은 국군 8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이종범이 있다. 이 때 그는 적에게 포위되면서 3일간에 걸쳐 적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였고 끈질기게 추격하는 적과 싸우다 오른쪽 어깨에 파편상을 입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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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2006년 12월 19일자 기사, 군현충시설탐방 <43> 강원도 인제지구전투 전적비.

국방일보 2007년 2월 7일자 기사, 군현충시설탐방 <50> 임진강지구 전적비.

국방일보 2010년 6월 7일자 기사, 전투전적기념물을 찾아서 <1> 백마고지 위령비.

국방일보 2010년 6월 14일자 기사, 전투전적기념물을 찾아서 <2> 저격능선전투전적비.

국방일보 2010년 12월 6일자 기사, 전투전적기념물을 찾아서 <17> 펀치볼지구 전투전적비.

천지일보 2010년 11월 16일자 기사, 장진호전투와 ‘안보공원’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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