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반도를 통과하는 북위 38도선 이북을 점유하고 있던 북한 공산군이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불법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까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쳤으며 각종 시설과 문화재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이로 인해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되었으며 세계적으로 냉전이 종식된 지금까지도 남한과 북한 간의 적대적 대립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6·25전쟁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국민들뿐만 아니라 타국에 머무르고 있던 동포들에게도 크나큰 충격과 마음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재일동포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6·25전쟁 이전에도 소규모의 국지전 소식은 빈번하게 들려왔지만 전면적인 남침이라는 소식이 들려오자 재일동포 사회는 놀라움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38선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의 심각성을 파악한 일본의 각 언론들은 6·25전쟁의 전황을 크게 보도했고 화력과 병력의 열세에 놓인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는 소식에 재일동포들은 하루하루를 불안과 초조 속에 보내야만 했다.
6·25전쟁 발발 소식을 1면 톱으로 대서특필한 1950년 6월 26일자 아사히신문
1950년 6월 26일 미국이 중심이 된 유엔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북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철수를 경고하였으나 북한은 공격의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결국 전쟁 발발 3일 만에 대한민국은 서울을 공산군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결국 6월 28일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문을 채택하여 본격적인 개입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후 미국은 7월 1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을 부산으로 긴급 투입하여 공산군을 저지하게 하였으나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유엔에서는 7월 7일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고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유엔군을 구성하였다.
유엔군은 미군을 주축으로 영국, 캐나다 등 총 16개국이 군사를 지원해주었으며 스웨덴, 인도를 비롯한 5개국에서는 의료부대를 지원해주는 등 세계 각지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 그러나 전쟁 초기 전세는 아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고 대한민국의 임시수도는 대전에서 대구로 계속해서 남하하였다. 8월 초에는 유엔군과 국군이 낙동강 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국을 돕기 위한 방법을 계속해서 모색하고 있던 재일동포 청년들은 결국 참전을 결행하게 되었다.
- 재일학도의용군 양태근 씨 회고록 중에서 -
6·25전쟁 소식을 전해들은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은 충격과 슬픔에 북받쳐 조국을 위한 참전을 결심하게 된다. 전쟁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재일동포 학생들의 조직인 한국학생동맹(약칭-한학동)과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약칭-건청)에 모인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참전을 결정하였고, 그 굳은 결의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에 제출했다.
민단에서도 6월 27일 중앙본부 집행위원회를 긴급 소집하여 대한민국과 조국의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하였으며, 6월 30일 전국 청년학도 자원병 파견과 구호물자 및 위문품 보내기 운동 전개 등의 결의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재일동포 청년들의 참전의지가 반영된 결의안 채택 이후, 7월 17일 한학동과 건청은 합동으로 자원병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고, 8월 15일 민단 중앙본부는 자원병지도본부를 설치하여 지원서를 접수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식이 재일동포 사회에 알려지자 지원서를 접수받는 창구에는 조국전선으로 달려가려는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 도쿄에서는 약 120명, 오사카에서는 약 80명이 참전의사를 밝혔고, 나라현 13명, 미야기현 7명을 비롯해 고베, 교토, 시코쿠, 오카야마, 히로시마, 후쿠오카, 야마구치현, 가나가와현 등 재일동포들이 모여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본 전역에서 약 1,000여명이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재일대한청년단 오사카 본부에서 조국전선으로 참전을 자원하는 의용군을 모집하고 있다는 신문기사
자원병지도본부는 지원서를 제출한 청년들이 빠른 시일 내에 조국전선으로 출정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줄 것을 대한민국주일대표부에 계속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주일대표부는 청년들의 애국심은 높이 평가하지만 학생들의 본업은 공부이니 학업에 열중하여 전쟁이 끝난 후 조국 재건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전념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한들 나라가 없어지면 무슨 소용이냐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들의 의지가 너무나 완강함을 깨달은 주일대표부는 결국 미극동군총사령부와 교섭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미군의 점령 하에 있던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미극동군총사령부의 협조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총사령부에서는 처음에는 작전상의 이유를 내세우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청년학생들은 탄원서를 쓰는 한편 총사령부 건물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기도 하고 혈서까지 써가며 자신들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했다. 이러한 행동이 계속되자 처음에는 거절했던 미극동군총사령부에서도 결국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의 참전을 승낙하고 말았다. 이러한 총사령부의 입장 변화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학생들의 의지가 미군측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완강하였으며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중 한국의 지리와 언어에 서투른 미군을 지원할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에게 미군과 함께 전선에 참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전쟁 발발 당시 본국에서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시도한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지원한 청년들은 징집영장도 발부되지 않는 일본에서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행을 선택했다.
일본인들마저 한국의용군에 지원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한 일본 기사
지원자들의 대열 중에서는 젊은 여성들도 끼어있었으며 일본인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18세밖에 되지 않는 재일동포 처녀는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 “자신의 조국은 자신의 손으로 지키겠다”며 미극동군총사령부에 자신을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 화제가 되기도 하였으며, 민단에서는 후쿠시마현의 일본인 청년 대표가 혈서로 작성한 100여 명의 일본인 지원자 명단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 일본인 청년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한반도를 불법 강점하여 식민지 통치를 자행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참전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 순수하고 고결한 마음은 재일학도의용군의 나라사랑 정신과 함께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