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학도의용군회원 인터뷰

재일학도의용군 인터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한국행을 선택
6·25전쟁에 참전한 청년들의 이야기

INTERVIEW
미 3사단 의무병으로 활약했던 강대윤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다

강대윤 씨는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천 공립보통학교를 마친 후 교장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가 열네 살 때였다.

“당시 공립학교 교장선생님이 일본사람이었어요. 보통학교를 마치고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그런 저의 마음을 교장선생님이 헤아리셨는지, 저를 추천해주셔서 일본으로 유학을 갔어요.”

강대윤 씨는 그의 열망과 가능성을 눈여겨보신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일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상황은 그의 애초 의지와는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공부를 할 목적으로 갔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어요. 당시 일본은 태평양 전쟁 중에 있는 상황이어서 교장선생님이 추천해준 학교에 공식적으로 입학절차를 밟을 수가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교장선생님께서 잘 아는 의사선생님이 계셔서, 그분이 운영하는 병원에 취업을 하게 되었지요.”

비록 원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지만 강대윤 씨는 중학교 강의록을 구해다 독학을 하면서 공부에 대한 열정을 품고 인생을 설계해나갔다고 한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흘러 일본에서의 생활도 안정되어 갈 무렵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꿈속에서 짓밟히는 고향을 보고 참전을 결심하다

강대윤 씨가 처음부터 참전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황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고 한다. 만약 대한민국이 이대로 없어진다면 과연 가슴을 펴고 다닐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그를 짓눌렀다. 그리고 자꾸만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고 한다.

“아버님은 아홉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제가 일본에 있을 때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실 때 어머님이 제 이름을 계속 부르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항상 그 장면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곤 했어요. 그날도 자꾸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러다가 잠깐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고향이 꿈에 나타난 거예요. 고향 마을이 불타고 짓밟히고 있는데 갑자기 고향 어른들이 나타나서 ‘너는 뭐하고 있느냐!’고 막 꾸짖으시는 겁니다. 그러다가 잠이 번쩍 깼어요. 너무 현실 같았어요.”

평소에는 꿈을 잘 안 꾸는 편이었던 강대윤 씨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자기 전에 읽던 신문을 다시 펼쳐보았다.

“갑자기 조그마한 신문광고가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바로 학도의용군을 모집한다는 광고였어요. 그 광고만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겁니다. ‘아, 자원해서 한국에 가라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결심을 굳히게 된 강대윤 씨는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전쟁 참전이 어머님이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강대윤 씨가 입대 의사를 밝히자 병원장을 비롯한 병원 식구들은 모두 펄쩍 뛰며 그를 만류했다.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14년간이나 근무를 같이 하며 가깝게 지냈던 그가 갑자기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하니 모두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특히 일본인들은 전쟁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일본인들은 대부분 태평양 전쟁 때 가까운 사람들을 전쟁터로 보내야만 했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패전 후에 비참하게 사는 군인들도 참 많았죠. 저보고 그걸 보고도 가야겠냐고 모두 말렸죠. 그렇지만 저는 ‘나는 출세하기 위해서 군대에 가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 짓밟히고 있는데 우리 부모, 형제들이 짓밟히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지금 가지 않고 편안하게 지낸다면 평생 가슴에 후회가 남을 것이다. 나를 말리지 마라.’ 그러니까 그 친구들이 듣고 있다가 ‘그러면 가라. 대신 죽지 말고 살아 돌아와라.’ 그랬어요. 그리고 요세가키를 만들어서 저에게 건네줬죠.”

‘요세가키(よせがき)’는 일본어로 ‘여럿이 한 장의 종이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전쟁에 참전할 때 가족친지들과 지인들이 무사히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국기에 글을 써서 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구하지 못했던 일본 친구들은 일장기를 사와서 강대윤 씨에게 먼저 건넸다. 강대윤 씨는 일장기의 붉은 동그라미에 태극무늬를 그려 넣고 ‘대한민국 만세’라고 썼다. 그러자 친구들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축, 출정’, ‘평화의 선구자’ 등을 말을 써 넣었다. 그렇게 그는 지인들의 염원을 뒤로 한 채 미군 보충부대 캠프 모리에 입소했다.

일본 지인들이 써준 강대윤 씨의 요세가키

의무병이 되어 전선에 뛰어들다

강대윤 씨는 재일학도의용군 4진으로 참전하여 미 3사단 의무대대 의무중대에 배속되었다. 직접 전투부대에 소속되어 총을 들고 싸우고 싶었지만 일본 병원에서 근무한 경력을 고려한 미군 측에서 의무병으로 배속시켰던 것이다. 그는 보병으로 참전하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미군 측은 보병 못지않게 의무병의 임무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강대윤 씨가 근무했던 미 3사단 의무대

강대윤 씨는 의무병 교육을 마친 후 고쿠라항에서 승선하여 1950년 11월 10일 자정 무렵 원산에 도착하였다. 일선 전투지역을 따라 원산과 영흥 부근에서 주둔하고 있던 그의 부대는 북진하는 부대를 따라 장진호 부근까지 갔다가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참전으로 급히 함흥을 거쳐 흥남으로 철수했다. 강대윤 씨는 한국전쟁 동안 흥남에서 근무했던 기간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흥남에서 있으면서 수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했어요. 그 때 중공군과 싸우느라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것을 많이 보았죠. 졸병이든 취사병이든 상관없이 부상자들을 치료해야 할 정도였어요. 거의 잠을 못자서 바로 옆에서 포를 쏘아도 쓰러지면 잠들곤 했죠. 그때 우리 부대에 군의관이 3명 있었는데 부상자가 너무 많아 흥남 앞바다에 정박해있는 해군에서 2명을 더 지원받아서 치료를 해도 그렇게 쉴 새가 없더군요.”

강대윤 씨가 속한 의무대는 흥남의 한 비료공장 부속병원 건물에 의무실을 설치하고 전방에서 후송되어 오는 부상자들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잠 잘 틈도 없이 매일같이 부상병의 응급치료에 매달리면서 그렇게 2주일을 보냈을 무렵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이른바 흥남 철수작전이었다. 12월 23일 흥남부두 앞 수송선에 승선한 의무대는 이틀 뒤 새벽 부산에 도착했다. 강대윤씨는 그 후 경북 경주에서 재편성한 부대를 따라 다시 전방으로 이동하여 서부전선의 백마고지와 오성산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비록 총을 잡고 전투를 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생명을 구한 그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미 제3사단장으로부터 표창장도 받았다.

버팀목이 되었던 요세가키를 추억 속에 묻다

그렇게 미군에서 4년간을 복무한 강대윤 씨는 휴전과 함께 다시 한국군에 편입하여 2년을 더 복무하였다. 그리고 1956년 7월에 중사로 제대를 하였다.

“56년 7월 달에 제대를 하는데 옛날 고등학생들 검은 교복 있잖아요. 한참 더운 여름일 때였는데 그런 옷을 제대복으로 주더라고요. 그걸 입고서 돈 한 푼 없이 맨몸으로 제대한 거예요.”

당시 대부분의 군인들이 그랬듯이 강대윤 씨도 복무를 하면서 월급 같은 것은 전혀 구경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살아계신 형제들과 조카들을 상봉할 수 있었다. 꿈에 나타날 정도로 그렇게 걱정되던 고향 형제들과 친지들이 무사한 것만 해도 그에게는 충분한 보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향에 잠시 머무르다가 당시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모여 있던 인사동으로 상경한 후 인천에 있는 미군 부대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인천항만 사령부에 위치한 미 8군 보안과에 취직을 해서 한 4년 동안 일했어요. 그것이 계기가 돼서 인천에 정착하게 되었죠.”

그 이후로 죽 인천에서 생활해 오면서 재일학도의용군 인천지부의 활동도 겸해왔던 강대윤 씨는 2010년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요세가키를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 기증했어요. 전쟁터에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가슴에 지니며 한평생 소중하게 간직해왔지만…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자손들이 할아버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증거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의 강대윤 씨.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국전쟁, 휴전 후 한국에 정착하기까지 숱한 어려움과 고난의 그 과정동안 그를 지켜준 버팀목은 무엇이었을까. 강대윤 씨 또래의 그 세대들은 일제강점기 때는 조국의 광복을, 한국전쟁 때는 조국의 자유와 수호를, 휴전 이후에는 조국의 성장과 발전을 목표로 달려왔다. 그 험난한 시기에 강대윤 씨에게 힘이 되어준 요세가키와 같이 조국은 그들에게 그런 존재였으리라. 이제는 나이 들어 강대윤 씨는 마지막으로 그 요세가키마저 내놓으면서 그와 함께 가슴 속 깊은 곳의 소망도 함께 꺼내놓았다. 그 작은 소망은 바로 이 나라와 자손들이 그와 재일학도의용군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내놓았던 것에 비하면 아주 소박한 바람에 지나지 않은 그 바람을 이제는 우리가 들어주어야 할 때이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총무부장 곽해면
고향이 공습을 당한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곽해면 씨는 어릴 때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를 했다. 집안 사정상 그는 학업을 계속 하지는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했다고 한다. 일본말로 ‘센베이’라고 하는 과자를 굽는 일이었다. 당시 히로시마현 해안의 구레라는 곳에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던 그는 갑자기 터진 한반도에서의 전쟁에 평온한 일상을 뒤로 하고 참전을 결심하게 되었다.

“제가 어릴 적에 자란 곳이 경북 성산인데, 어느 날 보니 뉴스에 제가 다녔던 학교하고 군청이 나오더라고요. 뉴스 내용을 들어보니 공습을 당했다고 해요. 그걸 보니 피가 거꾸로 솟구쳐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죠.”

어린 시절의 향수와 기억이 묻어 있는 고향 산천. 푸근한 고향 사람들과 그리운 동네 친구들. 타국 땅으로 이주한 이들에게 고향에서의 추억은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과도 같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애틋하게 간직해 왔던 고향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모습을 본 곽해면 씨의 마음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파괴당한 것과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렇게 그는 참전을 결심했고 가족들 몰래 미군 부대로 가는 열차에 오르게 되었다. 출발할 때 어떻게 아셨는지 형님이 달려와 그를 붙잡았지만 곽해면 씨는 이를 뿌리치고 결국 열차에 올랐다.

조국 땅의 첫인상 너무나 서글퍼

그는 재일학도의용군 5진으로 참전했다. 5진은 규슈 지방에서 모여 미군 보충대대에 입소한 뒤 바로 다음날 나가사키현 사세보항을 출발하여 한국으로 건너온다. 곽해면 씨는 1950년 10월 18일 부산항에 도착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배 위에서 바라보니 산에 나무가 하나도 없고 시가지에서는 뿌연 연기 같은 것이 막 피어오르고 있었죠. 정말 가난하고 처량한 모습이었어요. 부두에 배를 대니까 항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식량을 나누어 달라고 손을 내밀더군요. 먹을 것을 다 던져주고 말았죠. 너무 서글펐어요.”

서울이 함락되면서 온 나라가 전쟁터로 변하자 임시수도로 지정되었던 부산에는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부산항을 마주보고 있는 대청산 비탈 뿐 아니라 골목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오갈 데 없는 피난민들이 빽빽하게 판자촌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조국에 도착하자마자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비참한 동포들의 삶을 대면해야만 했던 곽해면 씨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부산에 상륙한 재일학도의용군들 5진은 한국군 부대로 이송되었다. 당시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을 통과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북진을 계속 하고 있던 시기였다. 전세가 아군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군은 당장 급한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국군에 이들을 인계한 것이었다. 앞서 입소한 재일학도의용군들과는 달리 한국군에서 훈련을 시작하게 된 5진은 한국말을 거의 몰라 한참을 헤맸다고 한다.

“한국말을 모르니 ‘차려’, ‘열중쉬어’ 구호를 전혀 몰랐죠. 일본에서 온 사람들만 따로 2개 소대를 만들어 훈련을 받았는데, 첫날 정렬을 한 후에 지휘관이 “차렷!” 하니 알아듣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다행히 그 중에 한국말을 조금 배운 사람이 있어서 ‘차려’와 ‘열중쉬어’는 일본말로 통역을 해 줬어요. 그렇지만 나머지는 잘 몰라서 ‘뒤로 돌아가’를 일주일 동안 반복했지 뭡니까. 한 시간이면 배울 것을…”

말이 통하지 않아 실수도 많았지만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애국심만은 그 누구 못지않게 불타올랐다고 한다.

“빨리 전방에 보내달라고 파업까지 했어요. 최전방에 보내달라고 우겼죠.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에서 파업을 하다니 큰일 날 짓을 한 거죠. 일본에서 왔다고 많이 봐 준거 같아요.”

한편 아군의 계속되는 북진으로 곧 끝이 날 것만 같았던 전쟁은 어느새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악화되어 있었다. 전세가 역전되자 육군 훈련소에는 소집명령이 떨어졌고, 약 3천 명 정도의 훈련생들이 전방으로 차출되어 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곽해면 씨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기관요원으로 남아 후임이 들어오면 훈련을 시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동료들과 함께 전방으로 떠나지 못한 그의 마음은 무거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8명의 기관요원 동료들과 함께 맡은 바 소임을 다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또 문제가 생겼다.

“당시 국군의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어요. 미군과 참 비교되었죠. 미군부대에는 2~3일밖에 안 있었지만 거기서 주는 식사와는 너무나 차이가 났어요. 불면 훅 날아가는 군량미 주먹밥에 양도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만 영양실조에 걸리고 말았어요.”

후방의 사정도 그러한데 전방에서 싸우는 전우들의 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마는 키가 크고 지금도 무척이나 마른 곽해면 씨는 당시 그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체력이었다. 그는 결국 영양실조로 제대를 해야만 했다.

영양실조로 제대했지만 다시 복귀해

곽해면 씨는 제대 후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일본 귀환을 기다린다는 부산 초량의 소림사로 찾아갔다. 그렇지만 그는 소림사에 얼마 있지 못하고 다시 부대로 복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곳에서의 열악한 상황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찾아갔을 당시 소림사는 정말 말도 못할 사정이었습니다. 이불이 없어 바닥에 가마니를 깔아 놓고 절단 환자들이 누워 있었어요.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 환자들이 절 밑에 있는 시장에 가서 꽁치 같은 생선을 얻어 와서 조그마한 냄비에 조려서 먹으려고 하면 서로 먹으려고 싸움이 일어나곤 했죠.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림사를 나온 곽해면 씨는 다른 동지들이 차출되어 간 전방의 국군 9사단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당시 금화에 있었던 사단을 찾아가는데 무려 보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에서는 이미 제대한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이번에는 미군을 찾아갔다고 한다. 미군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취사병으로 받아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미군으로 들어간 그는 약 3년 2개월 동안을 그곳에서 복무하게 되었고, 제대를 했을 때는 이미 귀환할 수 있는 길은 막혀버리고 난 뒤였다.

부산 초량동 소림사의 현재 모습

가족과는 20년 만에 재회

“돈이라도 있었던 사람들은 몰래 밀항을 하기도 했지만 난 그러질 못했어요.”

일본정부가 허가도 없이 무단 출국했다는 이유로 재일학도의용군의 입국을 거절하자 당시 밀항을 해서라도 돌아가려는 의용군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밀항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들어오는 길에 들키게 되면 나가사키의 오무라 수용소에 갇혔다가 추방당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수용소에 갇혔던 재일학도의용군들도 있었지만 재일동포들의 간절한 청원으로 무사히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무런 보수 없이 군복무를 했던 곽해면 씨는 밀항의 기회조차도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 정착하게 된 곽해면 씨. 가족은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오사카 박람회할 때 그때 처음 갔어요. 1970년도였죠. 만 20년 만이었어요.”

당시 오사카 박람회는 아시아 최초의 세계박람회로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룬 일본을 세계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거류민단에서 일본교포들에게 한국의 발전상을 알리기 위해 곽해면 씨를 비롯한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회원들을 초청했다고 한다. 그 기회를 통해 곽해면 씨는 당시 오사카로 이주해 있던 가족들을 만나 눈물의 상봉을 할 수 있었다.

언제나 기다리시게 해서 형님께 너무 죄송합니다

이제 곽해면 씨도, 다른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도 여든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남아있는 회원들은 고작 60여명. 한국에 남은 이들 중 살아있는 사람은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옵니다. 정말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말이 새삼스럽지 않은 나이가 되었죠.”

이제는 가족도 일본에 계신 형님밖에 남지 않았다. 병든 몸으로 홀로 타국의 노인요양원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고 계신 형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는 곽해면 씨.

일본의 한 요양소에서 형님과 상봉한 곽해면 씨
출처 : KBS 수요기획 “우리는 재일학도의용군입니다”

2010년 6·25전쟁 60주년 기념으로 일본 출정지를 방문했을 때 뵈었던 형님이 떠오른다. 15년만에야 다시 만난 형님은 병들고 나이든 모습으로 60년 전 그날처럼 한국으로 떠나는 곽해면 씨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때 그 열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그 때 일본으로 그냥 돌아갔더라면…’ 그는 이런 생각을 수없이 되뇌지 않았을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삶과 행복을 희생해야만 했던 많은 이들의 아픔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16, 17대 회장 김병익
타국땅에 살았기 때문에 더욱 조국이 각별했죠

“우린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더욱 애국심이 각별했던 것 같아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광복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열사들에게 우리 학생들이 돈을 걷어다 사식을 넣어주기도 했죠. 아키다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던 박열이라는 광복열사가 아직도 생각나요. 그 몇 푼 걷어서 갖다 주었을 뿐인데도 고발을 당하고 그랬었죠.”

박열 독립열사는 경북 문경 출신으로 3·1 운동에 참가한 뒤 탄압을 피해 도쿄로 건너가 일본 내에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였던 인물이다. 그는 특히 재일 유학생들 및 아나키스트들과 의기투합해 천황가에 대한 폭탄테러를 모의하다가 사형선도를 받고 아키다 형무소에서 장장 23년간 옥고를 치른 후 광복과 함께 출소하였다.

이러한 광복지사를 보면서 해방의 꿈을 품고 자란 김병익 씨와 같은 세대들에게 대한민국의 광복은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었겠는가.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은 나라를 되찾았다는 기쁨과 자부심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법관의 꿈을 접고 조국으로 향하다

“또 나라가 없어지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학생대표들이 당시 일본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던 미극동군총사령부, 맥아더 사령관이 있던 곳이죠, 거기에 신청을 했죠. 처음에는 받는다 안 받는다 말들이 많았지만, 결국 허가가 났고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습니다.”당시 김병익 씨는 스물한 살. 동국제국대학 법률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법관이 되고 싶었던 그는 또다시 사라질지도 모르는 대한민국을 위해 미련 없이 참전을 결심했다.

“물론 가족들이 못 가게 했죠. 몰래 도망치다시피 해서 군대에 가게 됐어요. 가족들도 처음에는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몰랐을 거예요.”

만류하는 가족들 몰래 입대해야 할 만큼 그에게 조국은 그런 존재였을까. 낯선 땅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치러내야 하는 전쟁이 두렵지는 않았을까.

“별로 무서운 건 없었어요. 전쟁이니깐 싸워서 이겨야 된다는 생각만 있었어요. 이기지 못하면 나라를 뺏기니까…”

김병익 씨를 포함해 2진으로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 266명은 1950년 9월 24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재일학도의용군 1진 다음으로 인천 앞바다에 도착한 2진은 상륙 시점을 기다리느라 2박 3일을 바다 위에 떠 있다가 인천 올림푸스 호텔 주변 해변에 상륙을 하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상륙 명령을 떨어지고 나서 고무보트 같은 것을 타고 바닷가에 상륙을 했어요. 컴컴한 밤이어서 바로 시내로 진격하지는 않고 모래사장 위에 천막을 치고 그날 밤을 보냈죠. 나중에 일어나 보니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들 위에서 우리가 자고 있더라고요. 놀라긴 했지만 이런 게 전쟁이다 생각하니 겁은 나지 않았어요. 거기서 우리는 인천으로, 부평으로, 그렇게 서울까지 진격을 해서 들어갔어요.”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뒤엎은 역사적인 상륙작전이었다. 그리고 아군은 이 작전의 성공을 발판으로 서울까지 진격하여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김병익 씨를 비롯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이 함께 한 것이다.

미 3사단에 배속되어 전장을 누비다

김병익 씨는 상륙 후 미 3사단에 배속되었다. 그 후 그는 미군에서 부산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하사관 학교를 수료했다고 했다. 당시 재일학도의용군 중에는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초급장교와 하사관이 부족했던 국군으로 차출되어 간 사람이 많았다. 그는 그곳에서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재일학도의용군 중 가장 한국말을 잘 했던 그는 일본항공대에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재일학도의용군 이규달, 박청남, 박연규 씨를 당시 대구의 육군본부 작전국 항공과로 전출하는 데 동행하게 되었다. 6·25전쟁 당시 조종사가 부족했던 국군에서 이들은 이후 육군항공대 창설과 조종사 양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김병익 씨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부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린 뒤였다. 그 길로 그는 걸어서 미 3사단을 찾아갔다.

“돈도 없죠, 먹을 것도 없죠, 아무 것도 없이 굶으면서 며칠을 걸어가는 거예요. 젊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수소문 끝에 찾아가 보니 미 3사단이 금화, 연천 쪽에 있더군요. 그곳에 가니 입대할 때 같이 있었던 우리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이 있더라고요. 잘 왔다고 그러면서 반겨주었어요.”

그렇게 다시 미 3사단으로 돌아간 김병익 씨는 6·25 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 중 하나였던 백마고지에서 복무를 했다.

“연천, 금화 쪽이 최전방이니까 잠시도 방심할 수 없었죠. 밤에는 수색대가 나가고 낮에는 총을 쏘고 전쟁을 하면서 조금씩 진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철원 벌판까지 들어갔고 백마고지에서도 전투를 했어요. 내가 백마고지 전투를 하러가다 총을 맞았거든요. 헬리콥터가 와서 저를 태워서 인천 바다에 가니깐 병원선이 있더라고요. 거기다 입원을 시켰어요. 동양 사람은 저밖에 없었고 전부 미군밖에 없었죠. 한국 병원보다 시설도 좋고 기술도 좋아서 전 행운이었어요. 그 후 야전병원에 한 달 정도 더 치료 받고 퇴원을 하니 미군 3사단 중위가 저를 데리러 왔더군요.”

부상에서 완쾌된 그는 그렇게 부대로 돌아가 휴전이 되고나서도 복무를 계속하다가, 미 3사단이 철수할 때가 되어서야 제대를 하였다고 한다.

가족들 만나지는 못했지만 원망은 없어… 재일학도의용군 이름으로 회관을 짓는 것이 마지막 꿈

그가 제대했을 때는 이미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은 가로막힌 상태였다. 바로 미국과 일본 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문이었다. 이 조약으로 국권을 회복한 일본은 재일학도의용군에 대해 ‘일본의 허가를 받지 않고 임의 출국한 자들’로 규정하고 일본 입국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의용군들은 모두 242명. 미군은 그를 인사동 34번지에 데려다 주고 갔다고 한다.

“인사동 34번지가 그 때 우리 학도병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어요. 미군이 그곳에 데려다 주더군요. 처음에 제대한 사람은 부산 소림사에 있었는데, 소림사에 있던 사람들이 인사동 34번지로 와서 일종의 수용생활을 하고 있었죠.”

교통도, 통신도 지금처럼 발달해 있지 않았던 당시 바다 건너 있는 타국의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는 부모와 형제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중에 연락을 했을 때는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어요. 그때는 형도, 누나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완전 연락이 끊겼죠. 나중에 찾아보니까 형님도, 누님도 다 돌아가셨더라고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결국 가족과는 만나지 못했던 김병익 씨는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음을 알기에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못내 아쉬워했다.

이후 그는 국가에서 취직할 기회를 주어 공무원 생활을 하였고 돈을 모아 사업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은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렇지 못한 동지들이 훨씬 많았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에 연고가 없었던 재일학도의용군의 경우 낯선 한국 땅에서의 삶은 또 다른 전쟁터였으리라. 김병익 씨는 이들의 희생과 고단한 삶에 대해 국가가 무관심한 것을 무척 서운해 했다. 이제 한국에 남았던 242명 가운데 살아있는 동지들은 고작 30명 정도. 이들도 언제 세상을 뜰지 알 수 없다.

“올해도 회장직을 더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지 아직 마음을 못 정했습니다. 나이 들어 힘들고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그리 오래 하냐고 집사람이 그러지만… 허허, 이게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김병익 씨는 1973년부터 중학교 또는 초등학교 교과서 등에 꾸준히 수록되었던 재일학도의용군에 관한 내용이 이제 국가와 사회의 무관심으로 삭제되었다며, 역사의 뒤안길로 재일학도의용군이 사라질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죽기 전에 재일학도의용군 이름으로 회관을 건립하는 게 꿈이라는 그의 간절한 말 속에도 재일학도의용군이 이 나라와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무런 대가없이 조국을 위해 목숨과 젊음을 바쳤던 재일학도의용군. 이제 이들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우리 사회에 바라는 이 염원을 과연 지나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3·1 독립보병대대의 산증인 김완기
재일동포들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38선이 있었죠

본래 고향은 충청도지만 일본에 백부님과 누님이 계셨던 김완기 씨는 열세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배움의 열망이 있었던 그는 백부님이 계신 구마모토현에서 중학교 과정을 다니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광복이 되자 재일동포들은 감격과 환희에 넘쳐 모두들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광복 무렵 누님 댁에 머물렀던 김완기 씨는 당시 만삭의 누님이 산후조리가 끝난 후에 귀국을 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그 시기 김완기 씨는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본래 광복 후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즉 조총련이 재일동포들의 귀국사업과 생활 돕기, 우리말 강습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나 그 주도권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단체가 급격히 좌경화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에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청년들이 조직하게 된 단체가 건청이며, 이후 이를 토대로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 설립되게 된다. 광복 이후 급격한 이념 갈등을 겪은 한민족의 상황은 일본에 머물러 있던 재일동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 유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제일 왼쪽 위가 김완기 씨이다.

“좌경화된 조총련과 반공주의 청년들 간에 갈등이 매우 심했습니다. 대립투쟁을 비롯해서 혈투가 벌어지기도 했고 민단을 세우기 전에는 수많은 공갈과 협박이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은 38선이었지요.”

이렇게 본국에서의 사상적 대립은 재일동포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이들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는 38선이 생기게 되었다. 한 때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함께 투쟁했던 한민족들 사이에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이념적 괴리가 생기고 만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들은 민단 계열 재일청년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한 사상 대립이나 정치적 대립을 넘어서 같은 민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북한정권에 대한 분노였다. 김완기 씨를 비롯한 청년 학도들은 당장 궐기 대회를 열고 주일대표부에 진정서를 올렸다. 빨리 조국으로 가서 평화와 자유를 지켜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출전하기 전에 누님한테 말씀을 드렸죠. 조국에 전쟁이 터져서 가야 되겠으니 누님 눈 딱 감고 허락해 주십사하고 말이죠. 그랬더니 누님이 ‘이놈아, 애국하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죽으러 가느냐.’하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전 ‘죽으러 가는 게 아니고 조국을 구하러 가는 일입니다. 기다려주시면 좋은 일 하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설득했지요. 그리고 허가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다가 참전 통보를 받고 동경으로 갔어요.”

재일학도의용군만의 부대, 3·1독립보병대대

김완기 씨는 2진으로 참전했다. 인천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후 그는 부평에서 미 3사단 1소대 2분대 병참부대에 배속을 받게 되었다. 군번은 없었다. 그렇지만 충실한 업무 수행을 위해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자체적으로 소대장, 분대장을 선출하여 임무를 수행했다. 김완기 씨는 분대장을 맡았다고 한다. 다들 주어진 임무는 열심히 수행했지만, 죽을 각오로 현해탄을 건넜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후방 업무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일선으로 보내달라고 미군에 애원을 했다. 그러나 사령부에서는 후방에서 보급이 잘 되어야만 전방에서 잘 싸울 수 있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이들의 열성적인 청원이 계속되자 결국 사령부에서는 재일학도의용군들만의 독립부대 결성에 대한 허가가 떨어졌다.

“재일학도의용군만으로 구성된 3·1독립보병대대가 구성이 됐습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군대,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강한 군대로 북진에 참여해서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신념을 가지고 경기, 인천, 부평을 중심으로 각 부대에서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모여 구성이 되었던 겁니다.”

3·1독립보병대대의 결성에는 당시 미 제422보병연대에 근무했던 일본계 미국인 지미 고자와 중위가 큰 도움을 주었다. 고자와 중위는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사정을 듣고 제대로 된 훈련을 받기만 하면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이들에게 단일부대를 설립해주자고 상관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 건의가 타당하다고 판단한 사령관은 결국 단일부대 창설을 승인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1950년 10월 30일 재일학도의용군 323명의 ‘3·1독립보병대대’가 탄생한 것이다. 3·1이란 이름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를 담았으며, 지휘관으로는 지미 고자와 중위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3·1독립보병대대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급격하게 악화되는시기에 갑자기 해산명령을 받았다.

“어떤 사정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당시 중공군이 우리를 일본인 부대로 알고 미군을 압박해서 그렇다는 말이 있었어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해산명령에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동의할 수 없다며 저항했으나 미군의 입장은 단호했고, 대대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한편 3·1독립보병대대와 그 정신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한 고자와 중위는 1977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의 샘 하야카와 의원에게 편지를 보내 재일학도의용군과 3·1독립보병대대에 관한 사실을 알리고 이들에게 감사장을 수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몇 달 뒤인 1997년 5월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결국 이들에게 감사장을 전달하게 된다.

“지미 고자와 중위, 그 양반이 우리를 참 아꼈어요. 이 양반이 옛정을 잊지 못해서 캘리포니아주 의회에 우리 일을 알려서 감사장도 전달해 주었고, 인천 수봉공원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탑을 방문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같은 민족도 아니고 더욱이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하기까지 했던 일본인의 혈통을 가진 고자와 중위. 무엇이 그렇게 그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나라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은 국경도, 민족도 뛰어넘어 그를 감동시켰던 모양이다.

강제 제대 후 다시 참전하다

안타깝게 해산된 3·1독립보병대대의 해체 후 김완기 씨를 비롯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인천항에 직결하여 군함에 오르게 된다.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를 방문한 고자와 중위

“인천항에 직결을 해서 배를 탔어요. 군에서는 모든 것이 비밀이니까 행선지를 몰랐죠. 우리 생각에는 부산이나 군산 쯤 가서 부대이동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도착하고 보니까 일본인 겁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제대, 해체해라, 군복 벗어라, 가지고 있는 배낭이니 총이니 다 반납하라는 겁니다. 난데없는 벼락을 맞았어요.”

그렇지만 재일학도의용군들은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때는 이게 뭐냐고, 다시 가야되겠다고, 여기서 해산할 수 없다고 다들 난리였습니다. 그래서 전부 동경으로 갔어요. 동경으로 가서는 민단, 주일대표부, 미군사령부 할 것 없이 들러서 항의를 했죠. 그랬더니 조총련에서는 저 놈들이 왜 돌아왔냐고, 같은 민족 죽이러 간 인간 백정 놈들이 다시 도망쳐 왔다고 그러는 거예요. 누가 해야 될 소린데… 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가서 꼭 통일을 시키고 와야겠다고 그런 각오로 다시 돌아왔죠.”

결국 결사대가 조직되었고 재일학도의용군 58명이 다시 2차 참전을 하게 된다. 부산항에 도착한 이들은 육군 제2훈련소에 입대를 하였다. 그러나 한국말이 서툴렀던 이들은 한국식 훈련에 익숙해지는 데 몇 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 후 육군 훈련소는 하사관 학교가 되었고, 하사관 교육을 받던 중 김완기 씨는 예기치 못하게 큰 부상을 당하게 되어 육군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 그는 제36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몇 개월 받고는 다시 제5육군병원으로 후송이 되어서 52년도에 제대를 했다. 조국을 위해 최전방에 나가 싸우고자 했던 그의 꿈은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조국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았으면…

1952년도에 제대한 김완기 씨는 샌프란시스코 협정으로 인해 일본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소림사, 인사동 등 재일학도의용군이 모인 곳으로 이리저리 방황을 해야만 했다. 일본에 있는 누님은 1970년 오사카 엑스포 때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 20년이나 지난 뒤였지만 누님은 일본에 살아계셨고 조카들도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때는 조총련계에서 ‘대한민국은 못 산다, 불도 없어서 촛불도 못 켠다, 애들이 속옷도 못 입고 발가벗고 다닌다.’고 선전을 할 때예요. 그래서 ‘그렇지 않다, 우리 한국도 잘 산다.’ 이렇게 선전하려고 간 거예요. 지금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계속 남과 북은 서로 보이지 않는 38선으로 대적해 온 겁니다.”

그는 1952년 7월 23일 한반도에서 휴전협정이 맺어졌지만 그것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라고 강조했다. 총성이 잠시 멈추었을 뿐이지 오늘날까지 총구를 맞대고 대치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은 2010년 여러 가지 사건에서도 보다시피 아직 적화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이다.

“6·25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광복과 6·25를 경험한 산 증인으로서 나라가 있어야 자유가 있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국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젊은이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들이 젊은 시절 그렇게도 갈구했던 자유와 조국. 오늘날 우리는 이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이제는 늙은 노병이 되어버린 이들이 청춘을 바쳐 이룩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재일동포 2세로 참전했던 김재생
조국을 향한 열혈남아의 애국심

김재생 씨는 일본에서 사업체를 경영하던 아버지 슬하에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계셨고 한국에서 노무자 200명 정도를 데리고 가서 건축을 할 정도로 큰 사업을 하고 계셨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김재생 씨는 일본인은 아니었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6·25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일본 아사히신문을 보니까, 6·25전쟁이 발발했더라고요.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포진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한국전쟁에 참전 한다고 하니까 부모님께선 왜 죽으러 가냐고 말리셨어요. 부모님 말씀을 안 듣고 그냥 지원했어요. 마침 바로 우리 학교 옆에 미군 부대가 있었어요.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죠.”

운명처럼 다가온 조국 대한민국으로의 참전행. 당시 스무 살이었던 청년의 뜨거운 심장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김재생 씨는 미군 부대로 입대했고 4진으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최초의 카투사로서 참전하다

김재생 씨를 포함하여 재일학도의용군 4진으로 참전한 52명은 당시 캠프 모리라고 불리던 미 3사단 제8068보충대대에서 45일 동안의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카투사 고유군번을 정식으로 부여받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최근에 그는 최초의 카투사로서 미군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군번이 기억나느냐는 질문에 김재생 씨는 바로 군번을 읊어주었다.

“K-1138339. 제 군번이에요. 재일학도의용군들 중에 군번을 받은 사람은 우리 4진밖에 없었다고 해요.”

당시 재일학도의용군 4진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참 상승세를 타고 있던 아군의 정황상 급할 것이 없다고 판단됨으로써, 앞서 투입된 재일학도의용군에 비해 비교적 체계적인 입대 과정과 훈련을 거쳐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었다. 군번을 받은 그들은 일본 고쿠라에서 군함을 타고 바로 원산상륙작전에 투입된다. 원산은 김재생 씨가 태어나 처음으로 밟아본 고국의 땅이었던 셈이다.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 전우들은 거의 다 전사했죠

1950년 11월 원산에 상륙한 김재생 씨는 미 3사단의 공병대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이후 치러진 북진에서 미 해병대에 파견되어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무렵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허를 찔린 공산군은 개전 초기와는 달리 별다른 저항도 못한 채 북으로 후퇴를 계속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가 속한 부대도 비교적 수월하게 북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대가 장진호 인근에 다다랐을 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바로 중공군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인해전술로 아군을 죄어오는 중공군들에게 에워싸여 무려 2주 동안을 포위당했던 끔찍한 기억. 그것은 바로 장진호 전투였다. 김재생 씨는 3년 동안 치른 전쟁의 기억 중에서 특히 장진호 전투를 가장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때 정말 많이 죽었어요. 우린 처음에는 중공군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죠. 그러다보니 아군 비행기가 떨어뜨려준 보급물자 가지러 갔다가 죽고, 죽은 사람이나 다친 사람 데리러 갔다가 죽고… 그렇게 열흘 동안 포위당해서 싸우면서 후퇴한 거예요.”

카투사 창설 60주년을 맞아 미군으로부터 받은 감사패

대대병력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는 치열한 격전을 치른 끝에야 아군은 간신히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할 수 있었다. 김재생 씨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함흥으로 철수하는 대열에 낄 수 있었지만, 당시 북진에 참가했던 많은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은 불행하게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때 같이 파견 갔던 재일학도의용군 중에서 저하고 강대윤 씨만 살았어요. 강대윤 씨는 의무병이었는데 우리를 구하러 오다가 중공군이 너무 많아서 구하지 못하고 후퇴했어요. 전우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가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미군들도 너무 불쌍한 거 같아요. 남의 나라에 와서 그 젊은 나이에 죽어간 걸 생각하면…”

그는 그때 같이 싸웠던 미군병사들의 묘에도 참배를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면서 눈물을 닦았다. 비록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라도 해도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전우들이 싸늘한 시체로 남겨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김재생 씨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했을 것이다. 그 광경은 아마 눈을 감을 때까지 기억에서 지울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다시 태어나다

처절했던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그는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미군 수송편으로 경북 포항으로 무사히 철수하였다. 이후 그는 미군부대에서 한국군으로 편입되어 육군본부 직할 경비대에 배속되었고 그곳에서 일등병 계급장을 달게 된다. 그가 속한 육군본부 직할 경비대는 오대산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곳에서 공비토벌 임무를 수행하던 그의 부대는 다시 지리산으로 이동하여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 때 지리산 일대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 정규 병력이 집결하여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다. 게릴라전을 펼치는 공비토벌 작전은 지구 전투 못지않게 위험했다고 한다.

“6명의 전우와 함께 수색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은신해 있던 수십 명의 공비를 사살했어요. 그래서 전공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죠.”

그는 자랑스럽게 훈장들을 펼쳐보였다. 그것은 마치 고된 전쟁터에서의 시간을 치유해주는 치료약 같은 것이었다. 전우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던 김재생 씨의 입가에는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 후 그는 휴전이 될 때까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였고 휴전이 되어서도 군복무를 더 하다가 1954년 7월이 되어서야 제대를 하였다고 한다.

먼저 간 전우들의 넋을 달래주고파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 김재생 씨는 정부의 주선으로 미 8군 보안과에서 근무를 하며 한국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몇 년간 미군에서 근무하던 그는 이후 사업을 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그는 성공적으로 사업체를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김재생 씨의 마음속에는 항상 먼저 간 전우들에 대한 미안함이 숨어 있었다. 전사하거나 실종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로서 제사를 지낼 줄 자식도 없는 상태였고 당시 체계적인 절차가 없었던 탓에 한국이나 일본에 가족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전사 통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렇게 동지들의 넋을 제대로 달래주지 못하는 마음은 남은 재일학도의용군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남은 이들은 전우들을 위한 위령제를 열어주고 싶었다.

이에 당시 부산에서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부산지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김재생 씨는 위령제 기금 마련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다녔다. 그리하여 마침내 1961년 4월 10일 김재생 씨를 비롯한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의 각고한 노력으로 부산시와 경상남도, 군수기지사령부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지원을 받아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위령제가 거행될 수 있었다. 10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동지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었지만 그 자체로도 그들의 마음은 한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 인천·경기지부장을 역임하게 된 김재생 씨는 인천 수봉공원에 위치한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 건립 때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오사카에 있던 방림방적의 경영진을 만나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 건립취지를 설명하고 기금을 지원받음으로써 참전비 건립에 큰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김재생 씨는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도 인천에서 청소용역회사를 운영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훈장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다가도 전우들만 생각하면 눈물을 훔치는 김재생 씨는 아직도 열혈청년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옛 이야기를 하면서 후회나 미련은 전혀 없는 듯 했다. 단지 아직도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와 준다는 것이 마냥 기쁜 어린아이 같았다. 그런 순수함이 있었기에 낯선 조국 땅에 선뜻 자원했고 전우들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열정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재생 씨는 새벽에 일을 하러 나오는 직원들을 위해 새벽밥을 손수 짓는다고 한다. 전우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직원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그러한 순수함과 따뜻함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자그마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참전에서 조국재건까지 활약한 박운욱
꿈 많은 건축학도에서 참전병으로

박운욱 씨는 광복 후 1949년에 일본에 들어갔다. 당시 부산에 있었던 그의 본가는 불교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할머니와 외삼촌이 계시는 일본으로 불교 공부를 하러 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불교에 큰 흥미를 보이지 못했던 박운욱 씨는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결국 대학에 들어가 건축을 전공하게 되었다. 도쿄 마꾸하리에 살면서 대학을 다닌 박운욱 씨는 대학 문화에 흠뻑 빠져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꿈에 부푼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6월 25일 아침에 일어나니 신문, 방송, 호외고 머고 다 나왔는데 북한이 한국을 남침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학교로 가서 친구들과 만났죠. 그리고 간 곳이 한국유학생 모임이었어요. 일단 거기서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뉴스를 들었죠. 이미 26일에 북한군이 서울 근처에 와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어요. 4~5일 지나서 만났는데 그 때는 서울이 함락되고 수원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다, 우리가 가야겠다.’ 그렇게 된 거죠.”

박운욱 씨를 비롯한 재일청년학도들은 주일대표부에 자원하겠다는 진정서와 명단을 제출했고, 주일대표부는 이것을 미극동군총사령부로 보내 승인을 받았다.

“참전한다니깐 일본친구들은 다 미쳤다고 했어요. 당시 일본이 패전해서 고생하고 있을 때인데,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건 줄 보고도 그러냐고 했죠. 집에서도 그러고, 일본 친구들도 그러고, 다 반대했죠. 그렇지만 그 때 우리의 이념은 살아있었어요. 외국에서 살아본 사람들이 조국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마음을 합쳐서 ‘우리는 죽어도 괜찮다. 가자, 우리 한번 싸워보자.’ 그렇게 돼서 참전하게 된 거죠.”

그렇게 주변의 만류에도 참전을 결행한 박운욱 씨는 재일학도의용군 1진으로 아사카 캠프에 입소하게 되었다.

지바현 민단본부에서의 출정식 기념 사진.
앞쪽 제일 왼쪽 두 번째가 박운욱 씨이다.

통역 임무를 맡다

1진으로 입대한 박운욱 씨는 영어를 잘 했다. 그래서 그는 1진과 함께 출발하지 못하고 2진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명령을 받았다. 혼자 2진이 올 때까지 남은 그는 입소한 2진이 훈련을 할 동안 제일 앞에 서서 영어를 일본어로 통역을 해주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훈련이 끝난 2진과 함께 요코하마항에서 배를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상륙한 후 그는 부평의 보충대대로 와서 5~6일 정도 있다가 미 10군단에 소속되어 배에 오르게 되었다.

“배를 타고 10월 2일 원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주일 있다가 함흥으로 와서 활동을 했어요. 미 10군단에서 제가 있었던 곳이 한국군을 위한 보급을 하는 부대였습니다. 자동차, 기름, 옷, 식품 같은 것을 미군 대위와 상의해서 소령한테 결제를 받아서 한국군에 전하는 일이었지요.”

영어와 한국어, 일본어에 모두 능통하고 신분이 대학생으로 확실했던 그는 이외에도 미군과 한국군의 연락업무도 수행하여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함흥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박운욱 씨는 중공군의 기습으로 부대의 후퇴가 결정된 후 흥남으로 와서 철수작전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떠올렸다.

“철수작전이 내려지고 나서 우리는 흥남으로 와서 공장 사택에 자리를 잡았죠. 적군이 대포를 쏘아대서 유리창이 덜덜거리고 그랬습니다. 이미 그때는 동쪽의 미 8군은 서울까지 철수했어요. 미 10군단은 한국군을 비롯해서 미군 각 사단을 데리고 흥남 부두로 철수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죠. 우선 병력들부터 보내고 그 다음에 민간인들까지 모두 LST(미국의 상륙 작전용 함정)에 태워서 출발시키고 난 후 부두를 폭파시켰죠.”

특히 박운욱 씨는 한국군 연관급 가족들을 데리고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들을 비행기에 태워 12월 19일 부산의 수영비행장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난 후 그는 다시 미 10군단에 합류하여 경주, 안동, 충주, 원주를 거쳐 횡성으로 올라가 복무를 계속하게 되었다.

당시 미 10군단의 진격로

무사히 귀환해서 복학하다

횡성에서 근무하던 박운욱 씨는 폐렴에 걸려 부산의 미군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군에서는 일본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해주겠다고 했지만 왠지 혼자 돌아가기가 미안했던 그는 부산에 있었던 미군병원으로 보내달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부산중학교에 미군병원이 있었어요. 거기로 가게 됐어요. 그런데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당시 부산에 있는 소림사라는 절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서 같이 일본으로 귀환하기로 했습니다.”

같은 재일학도의용군 출신들을 만나게 된 박운욱 씨는 귀환을 위해 일본과 연락을 하고 있던 그들을 도와 함께 귀환을 하게 된다. 일본 사세보항에 도착하여 도쿄로 돌아온 이들을 당시 재일동포들은 뜨겁게 환영해주었다. 이렇게 일본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된 박운욱 씨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당시 주일대표부에서 대학생으로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을 위해 휴학 조치를 취해주어 별 다른 문제없이 무사히 복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국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복학 후 학교를 졸업한 박운욱 씨는 일본에서 건축사무소에 다니다가 조국의 재건에 기여하고자 한국으로 귀국을 하게 되었다. 먼저 그가 한 일은 한양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는 8년간 건축학과에서 건축자재, 철골구조, 건축응용학 등을 가르치면서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후 그는 73년도부터 6년간 포항의 산업단지 건설현장에 몸담았다고 한다. 20명 정도의 팀과 함께 포항의 산업화 시설 건립을 위해 활동한 그는 그 이후에는 또 독일로 진출해 설계 일을 했고 서울시청 별관 리모델링에도 참여하는 등 한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종횡무진 활약했다.

“외화도 많이 벌어가지고 왔죠. 저는 할 거 다 했어요. 지금까지 쉬어본 일이 없어요. 저 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는 자신의 위치에서 아낌없이 다 했습니다. 누군가 안 하면 안 될 일이었으니까요.”

6·25전쟁 참전은 물론이고 대학 졸업 이후 귀국해서 박운욱 씨가 이루어낸 모든 행적은 개인적인 성취 뿐 아니라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산업화 세대의 굳은 사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말하는 박운욱 씨를 보면서 지금은 너무나 발전하여 지나간 세월조차 무색하기만 한 우리의 오늘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편리하기만 현재를 살면서 불평하고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한번 되돌아 볼 때다.

통일이 가장 큰 소원이라는 박진우
우리도 조국이 있으니까 지켜야지요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마쳤던 박진우 씨는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집안 사정이 어려워 공부의 꿈을 접으려고 했던 그에게 일본 유학 제안은 정말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다.

“옛날에 저희 집안이 괜찮았을 때 임씨라는 분께서 조부님께 신세를 많이 졌었는데, 그분이 성공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조부님께 빚을 갚겠노라고 자손 중 뛰어난 사람을 책임지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겠다고 해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추천을 받아 일본으로 넘어가 공부를 하게 됐지요.”

박진우 씨는 당시 일본 동경에서 전구 제조 회사를 경영하던 임씨의 작은 아들 일가로 가서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는 법정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학업에 임했다. 그러던 중 중학교를 채 마치기도 전에 6·25전쟁이 터지고 만 것이다. 그는 당연히 조국을 지키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저는 제국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일본 군인들을 많이 동경했어요.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들의 애국심은 정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조국이 있으니까 젊은 우리들이 당연히 지켜야 되는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그는 망설임 없이 참전을 자청했고 재일학도의용군 3진으로 한국행 배에 오르게 되었다.

전장의 상흔이 아직도 몸속에 남아

박진우 씨를 포함한 3진 120명은 10월 5일 인천항에 도착한 뒤, 곧바로 경기도 이천으로 이동하여 미 7사단에 배속되었다. 7사단 17연대 3대대에 배속되었던 박진우 씨는 곧바로 북진에 투입되게 된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발판으로 북으로의 진격에 박차를 가하던 미군은 원산·이원상륙작전을 감행하였고 연이어 풍산을 지나 갑산과 혜산진으로 북진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결국 17연대는 혜산진 탈환에 성공하게 된다. 박진우 씨는 전우들과 함께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면서 통일에 대한 부푼 기대감으로 감격에 겨워했다. 그러나 감격의 순간도 잠시, 통일에 대한 벅찬 희망은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목숨을 건 철수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압록강과 백두산이 지척에 보이는 혜산진까지 갔었죠. 그런데 중공군 때문에 다시 삼수로 후퇴하고, 또 삼수에서 갑산으로 나오고, 갑산에서 풍산으로 나오고, 풍산에서 함흥으로 갔다가, 흥남으로 와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철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미 7사단의 북진경로. 갑산(甲山), 삼수(三水), 혜산진(惠山鎭)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른바 장진호 전투에서 흥남철수작전까지 이어진 후퇴였다. 이 때 북진에 참여했던 미군과 국군 부대들은 살인적인 추위와 중공군의 포위 공격으로 뼈아픈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당시 박진우 씨와 함께 미군에 배속되었던 3진 120명 중 무려 83명의 희생자가 나온 것도 바로 이 후퇴 과정에서였다. 다행히 무사히 철수를 할 수 있었던 박진우 씨는 부산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안동을 지나 충북 제천까지 와서 강원도 쪽 전방으로 투입되었고 오대산 전투와 금화지구 전투 등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강원도 인제 방면으로 북진하는데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기습을 당해 유탄을 맞았어요. 대퇴부를 부상당해서 홍천에 있는 미 7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당시 기술이 좋지 않아서 깊이 박힌 파편 2개는 결국 빼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비가 오면 쑤시고 당기고 그렇죠. 나이도 들고 해서 의사가 그냥 두는 게 더 낫다고 그러긴 합디다만…”

60년 동안이나 그의 몸속에 남아 있는 파편은 끝난 듯해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죽을 때까지 장애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이들에게 전쟁의 상흔은 너무도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것이리라. 그러나 부상 후 그에게는 뿌듯한 일도 있었다. 퇴원 후 국군으로 전속 명령이 떨어져 꿈에도 그리던 국군 군번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아무런 대가 없이 복무해온 그에게 제대 전에 주어진 유일한 선물이었다.

다시 한 번 조국의 부름에 응하다

1951년 9월에 명예제대한 박진우 씨는 일본으로 귀환하지 않고 가족들을 찾아다녔다. 전쟁 통에 한국에 있던 가족들의 생사를 먼저 확인하려고 했던 그는 다행히도 수소문 끝에 부산으로 피난 온 누님을 찾을 수 있었고 다른 가족들과도 상봉하게 되었다. 가족들을 찾은 그는 부산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59년 그는 다시 한 번 조국의 부름에 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바로 북송저지공작대 활동이었다.

6.25전쟁 후 북한은 수많은 사상자와 남으로의 귀환자들로 인해 심각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를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총련을 이용한 재일동포 북송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총 155차에 걸쳐 8만 8천명이 넘는 재일동포가 북으로 건너가자 남한 측에서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고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외교적으로 이를 해결하지 못한 한국 정부는 일본 사정을 잘 알고 현지 언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재일학도의용군에게 공작원 활동을 요청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박진우 씨를 포함한 재일동포학도의용군 출신 41명과 경찰간부시험 합격자 24명, 예비역 장교 1명 등 총 66명으로 ‘북한송환저지공작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훈련을 마친 북송저지공작대 대원들

“살기 좋다고 선전하고 혜택을 주니 북한도 조국이라고 귀향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거지요. 그렇지만 전쟁을 겪고 난 우리들은 그 실체를 너무 잘 알잖아요. 애꿎은 사람들이 북한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겠다 싶어서 참여한 거예요.”

박진우 씨는 3차 인솔자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경남 통영에서 고깃배를 타고 일본 고베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정치적으로 혼돈 상황에 있던 한국에서는 4·19혁명이 터지고 만다. 이것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 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북송저지대 공작활동은 갑자기 좌초되고 만다.

즉시 귀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지만 먼저 일본에 침투했던 공작원들은 귀국하는 도중 일본에 체포되어 출입국관리법 위반 등으로 실형을 살게 된다. 그러나 비교적 늦게 일본에 투입되어 공작활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박진우 씨는 신속히 귀국하여 체포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귀국 후 비록 일반 순경이지만 자유당 정부가 약속했던 경찰 특채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임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북송저지공작대 관련 서류를 파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 때 저와 같이 돌아온 4명이 순경으로 임용되었어요. 사실 공작대에 갔다 오면 경찰 하급간부, 경위로 채용해주기로 했죠. 그렇지만 순경으로 임용했고, 사실 그것도 북송저지공작대에 관련 서류를 정리하려고 뽑은 거였어요. 서류를 전부 정리해서 상급기밀로 분류해서 치안국 창고에다 보관하는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였지만 순경으로 임용된 박진우 씨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권이 바뀐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던 공작원들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고 심지어 공작활동 중 실종된 이들에게는 사망통지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먼저 돌아온 이들이 정리했던 서류들은 파기되었고 정부에서는 공작대의 존재조차도 부정했다. 동포들의 안위를 위해 소신을 가지고 참가한 활동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고 또한 함께한 동료들의 죽음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후 순경으로 몇 년간 복무한 박진우 씨는 상이군인 자격으로 공무원 시험을 쳐서 합격하여 공무원으로 20년간 근무했다. 끝까지 나랏일을 한 셈이다.

통일이 가장 큰 소원입니다

56세에 명예퇴직한 박진우 씨는 현재 강원도 원주에서 살고 있다. 20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지금까지 요양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그는 파편이 아직 박혀 있는 다리가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큰 어려움 없이 여생을 즐기고 있다. 재일학도의용군으로서 전쟁과 부상, 공작대 일까지 모두 경험했지만 다행히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면서 지난 일을 회고하는 박진우 씨는 통일이 남은 생애 유일한 소원이라고 했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라가 있어야 우리가 있는 겁니다. 우린 젊어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제는 남은 젊은 사람들이 조국을 지켜야 됩니다. 통일이 되는 날까지 젊은 사람들이 잘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백두산을 지척에 두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그날의 안타까운 마음을 아직도 간직한 채 통일이 가장 큰 소원이라는 박진우 씨. 몸속에 박혀있는 전쟁의 파편만큼이나 오랜 시간 품어온 온 숙원인 셈이다. 이제는 여든을 훌쩍 넘긴 그가 남은 생애 동안 혜산진에서의 그 감격을 다시 한 번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11대, 15대 회장 유승호
혈서로써 청원했던 조국 참전

유승호 씨는 14살 때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형님을 따라 도쿄로 건너갔다. 원래 유승호 씨의 고향은 충북 청주라고 했다. 그의 형님은 교수님 댁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를 마친 우수한 인재였고, 자연스럽게 유승호 씨도 그런 형님을 따라 일본에서 뒤늦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유승호 씨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과 미국이 한창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는 1945년 미국의 도쿄 공습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가 다녔던 중학교도 그 공습 때 폭격을 맞아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당시 그 중학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던 그는 그 폭격 때문에 도쿄에서 조금 떨어진 군마현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이렇게 전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조국이 전쟁터로 변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군마대학을 다니면서 민단 지부의 활동도 겸했던 유승호 씨는 6·25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도쿄의 민단 본부로 달려갔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어느새 낙동강 근방까지 적이 쳐들어왔다는 겁니다. ‘낙동강이 뚫리면 대한민국이 없어진다.’ 그런 위급한 마음이 들었죠. 얼른 민단에다 요청해서 미극동군사령부에 청원을 했더니 안 들어줬어요. 작전상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거절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혈서까지 쓰면서 들어줄 때까지 요구를 했어요.”

당시 많은 재일동포 청년들이 혈서, 연좌농성, 탄원서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미군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했다. 심지어 밀항을 시도하기도 할 정도로 그들의 참전 의지는 강력한 것이었다. 결국 그 열성을 이기지 못한 사령부는 이들에게 참전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열성적인 청원 끝에 유승호 씨는 78명의 동료들과 함께 재일학도의용군 1진으로 아사카 기지의 미 8군 보충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1950년 9월 12일 요코하마항을 통해 인천으로 향하게 된다. 형님에게는 전화로 대충 한국으로 간다고 알렸을 뿐이었다.

대한민국 육군 소위가 되다

미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재일학도의용군 1진은 그 후 뿔뿔이 흩어져 각 부대에 배속되게 된다. 유승호 씨는 제65탄약부대에 차출되어 갔다고 한다. 처음에 맡은 임무는 오래된 폐탄이나 불발탄을 모아놓고 폭파시키는 소위 탄약 폐품처리라고 하는 위험한 작업이었다. 그곳에서 3개월 정도를 근무한 그는 갑자기 귀환 명령을 받았다.

“미군과 전방에서 전투를 하던 사람들 중에 재일학도의용군이 포로로 잡혔던 거예요. 붙잡고 보니깐 한국말은 못하고 일본말만 했던 거죠. 그래서 중공군들이 일본에서 군대가 파견된 줄 알고 미군에 항의를 한 겁니다.”

일본군 참전을 의심받자 입장이 곤란해진 미군은 문제의 소지가 된 재일학도의용군들을 귀환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귀환을 거부했고, 일부는 육군본부와 교섭을 가진 끝에 한국군 입대를 정식으로 허락받고 1950년 11월 28일 당시 서울 남산초등학교에 자리 잡은 육군 제1보충대대에 입소했다. 이 때 유승호 씨도 동료들과 함께 육군 보충대대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간부후보생 선발시험 응시 기회를 얻어 합격을 하였다.

“한국말이 잘 안 되서 일본말로 썼죠. 그래도 붙었어요. 그때는 대학생들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

당시 국군은 초급장교의 극심한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학력이 높은 편이었던 재일학도의용군들에게 이와 같은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유승호 씨를 비롯한 합격자들은 당시 부산 동래에 자리잡았던 육군종합학교에 22기로 입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교훈련을 받은 후 국군 9사단 30연대 1대대 3소대장으로 배속되어 대한민국 육군으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9사단 30연대 소대장으로 전장을 누볐죠

오성산에서 전우들과 함께.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유승호 씨이다.

유승호 씨가 배속받은 부대는 당시 강릉에서 약 8km 떨어진 구산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는 중공군의 개입 이후 전선이 교착되면서 중부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유승호 씨가 소대장으로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참가한 연대 규모의 큰 작전은 매봉-한석산 전투였다.

당시 현리계곡과 인제 사이의 고지대를 통제하는 한석산은 이 일대의 최고봉으로서 이곳을 장악하면 소양강과 인제를 모두 감제할 수 있는 주요 요지였고, 한석산 남쪽 일부인 매봉은 한석산을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중요 고지였다. 유승호 씨가 지휘하는 3소대는 공격의 선두에 나서서 고지를 향해 돌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부여받았고 그는 수류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앞장서서 돌격하면서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어차피 가만있으면서 죽을 바에야 돌격을 하다가 죽기로 마음먹었죠. 소대장이 앞장서니까 소대원들도 모두 뒤따라 와주었습니다.”

유승호 씨는 그 이후로도 대관령, 인제, 금화, 철원 등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던 전장을 누비며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대관령 전투에 들어갔다가 그 다음에 백마고지, 그 다음에는 저격능선 쪽으로도 들어갔죠. 백마고지 전투 때는 정말 대단했어요. 12번을 밀고 밀리고 했죠. 저격능선 때는 제가 산꼭지에 배치됐는데, 연기도 못 피우고, 철모로 밥을 해먹어야 했어요. 낮에는 나오지 못하고 밤에만 나오고 그러면서 45일이나 전투를 치러냈죠.”

최전방을 누볐던 유승호 씨는 고생도 많았지만 영광스러운 순간도 많았다고 했다.

“오성산 전투에서는 중대장이 돼서 훈장을 탔어요. 598고지 전투, 금화전투에서도 훈장을 받았고요. 사단장 표창장도 받았고…”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라를 위해 싸웠던 젊은 날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는 이후 작전 지시를 받고 고지 능선을 타다가 폭탄이 바로 옆에서 터지면서 고막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복무를 계속하다가 1959년도가 되어서야 제대를 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제대 후 일본에 돌아갈 수 없음을 알자 원래 충북 청주가 고향이었던 유승호 씨는 부모님과 친지를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았지만 전쟁 통에 흩어져 찾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 갑자기 형님이 일본에서 통신 계통의 공부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고 한다.

“형님이 유학 시절 통신을 전공했으니 혹시나 싶었죠. 광화문에 서울신문 맞은편이 체신청이었어요. 거기를 가보니 형님이 진짜 계시더라고요.”

그렇게 극적으로 형님과 상봉한 그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한국에 자리를 잡았고 가정도 꾸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유난히 일 욕심이 많은 유승호 씨는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을 하며 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88년에는 사단법인이었던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가 공법단체화되어 명실공히 공식적인 국가유공자 단체로서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사회적 입지와 복지 기반을 다지게 되었고, 2007년에는 천안 망향의 동산에 재일학도의용군 위령비가 건립되는 등 유승호 씨는 재직 중에 재일학도의용군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아흔을 바라보는 요즘 유승호 씨는 당시 재일학도의용군의 활약상과 자신이 경험한 전투경험담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동안 남길 수 있는 것은 다 남기고 싶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열성적인 그 모습은 60년 전 현해탄을 건넜던 혈기왕성한 열정 그대로였다. 유승호 씨와 시대를 함께 했던 맥아더 사령관의 퇴임연설에 등장하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처럼 그는 그렇게 우리 곁에 계속해서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삼촌과 함께 참전했던 조만철
일본에서 받은 나라 없는 서러움이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저는 한국에서 살다가 소학교 3학년 때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사업을 하고 계신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오사카에서 아버님은 칫솔 제조업을 하고 계셨고, 작은 아버지는 무역업을 하셨어요.”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조만철 씨는 또래의 한국 청년들보다 윤택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중학교를 입학할 때에도 그런 부분 때문에 한국인이 좀처럼 가기 힘든 5년제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한 그는 일종의 전문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고등전문학교 기계과에 입학해서 1학년을 마친 후 휴학계를 내고 아버지 사업을 도와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비교적 어려움 없이 생활했던 조만철 씨에게도 일본에서 겪었던 서러움은 컸던 모양이었다. 그가 가슴 깊숙이 간직해 오던 조국에 대한 마음은 타향살이로 인해 누적된 고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려서부터 일본에서 받은 핍박과 서러움 때문이기도 했다.

“어릴 적에 한국인을 감시하는 형사들이 가끔씩 학교로 찾아왔어요. 아무런 이유 없이 제 책상을 뒤지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물어보곤 했지요. 그런 감시활동들이 점점 더 심해져서 어느 날부터는 저를 경찰서로 호출해서 심문을 하고 그랬어요.”

어린 나이의 조만철 씨에게는 이러한 형사들의 감시가 상당한 스트레스와 서러움으로 작용했고 그러면서 조국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은 점점 강하게 싹텄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광복 이후, 그는 조총련에 가입하여 광복의 기쁨과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동포들과 나누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총련 조직은 점점 거대해지면서 처음의 설립 목적과는 달리 정치적 색깔을 띠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만철 씨와 그 가족들도 조총련에서 탈퇴하였고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총련이 극단적인 좌익으로 가는 것을 보고 거류민단으로 옮겨서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에 6·25전쟁이 발발한 거죠. 바로 참전을 결심했습니다. 참전하고 싶다고 아버님한테 말씀드리니까 종손인데 전쟁터 같은 위험한 곳에 가면 어떻게 하냐고 반대하셨죠. 단식투쟁을 해서 허락을 얻어냈어요. 혈기왕성한 청년으로서 이런 기회에 조국에 가서 미약하나마 힘을보태야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삼촌과 함께 조국전선으로 향하다

조만철 씨의 집에서는 그의 삼촌인 조용갑 씨도 함께 자원입대를 하였다. 한 집에서 한 사람이 지원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조카와 삼촌이 함께 지원한 보기 드문 경우였다.

“조용갑 당숙은 아버지하고 사촌관계이고 따지자면 저한테는 오촌인 셈이죠. 저보다 세 살이 많아요.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어려서는 제삿날이면 씨름도 같이하고 가깝게 지냈어요.”

당시 재일청년들을 대상으로 자원병임시사무소를 운영했던 건국촉진청년동맹에서 열혈 청년으로 활동했던 조용갑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원래 건청에서 활동했던 터라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참전을 선택하게 되었지만 조카가 지원한다고 하니까 마음이 걸리더군요. 더구나 조카는 우리 집안의 종손이라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죠. 그렇지만 일주일 동안이나 밥도 먹지 않고 단식투쟁을 한 끝에 결국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용갑 씨의 집안에서는 삼촌과 조카가 나란히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들의 자원입대는 오사카 민단에서도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출정하기 전에 가족 친지들과 지인들이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글귀를 써 넣어준 태극기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었다. 손때 묻은 태극기에 새겨진 간절한 염원 덕분일까. 그는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났다. 그러나 그의 참전은 당시 가족들에게는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말 못할 슬픔이었을 터다. 그렇게 가족들을 뒤로 한 채 그는 재일학도의용군 2진으로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미군 보초에서 국군 소위로 임관하다

조만철 씨와 조용갑 씨는 오사카에서 열차편으로 도쿄로 이동하여 입대한 후 인천에 상륙하게 된다.

“우리는 상륙 후에 인천 부두에 위치한 석유회사에 10여 명 정도 배속이 되었어요. 그곳에서 제가 맡은 임무는 보초였지요. 큰 모선이 병참 물자를 싣고 오면 조그만 배로 월미도까지 물자를 옮겨와요. 그리고 창고에 물자를 옮기면 미군하고 저희가 같이 보초를 서는 거죠.”

미군에서의 편한 군복무는 조만철 씨가 애초 의도한 참전 목적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았다. 또한 그는 군번도 받지 못한 군인 아닌 군인의 신분에 실망이 컸다.

“참전을 결심했을 때에는 애국심에 불타서 자원입대를 했는데, 미군에 배속되어 전투에는 투입이 안 되고 보초만 서는 거예요. 게다가 우리는 군번도 없었어요. 군번을 달라고 하니깐 궁여지책으로 미군이 군번줄에 우리들 이름만 새겨서 나눠줬지요.”

일에서도 신분에서도 군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이 점점 커져가던 중에 조만철 씨는 뜻밖의 희소식을 접하게 된다. 바로 한국군에서 간부후보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이었다.

“한국군 육군 본부에서 육군종합학교의 생도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요. 그래서 삼촌과 같이 지원을 했죠. 당시 육군 본부가 대구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시험을 보러 갔어요. 일본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한글보다 일본어가 더욱 쉬웠는데, 시험문제는 다 한국어로 출제되어 재일학도의용군은 불리한 편이었죠. 그래서 상부에 건의를 해서 일본어로 문제를 풀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지요. 다행히 상부에서 정상참작을 해주어 시험에 합격했어요.”

그 후 삼촌 조용갑 씨와 나란히 소위로 임관한 조만철 씨는 국군 11사단 화랑부대에 배속되어 전장을 누비게 된다.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다

11사단에서 조만철 씨는 9연대 화기중대인 8중대 소대장으로 근무를 하였다. 그의 부대는 주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서 활약하였다. 지리산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이었지만 퇴각하던 인민군 정규부대가 입산하면서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선 아닌 전선이 형성된 상태였다. 조만철 씨는 약 6~7개월 정도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는 군인도 군인이지만 민간인들의 희생과 고충이 참으로 컸다면서 당시를 회고했다.

“공비들은 낮에는 구덩이를 파고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민가로 내려와 음식을 조달해 먹어요. 민가에 사는 사람들은 가족들이 공비들한테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몰래 음식을 지원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낮에는 대한민국이었다가 해가 지면 인민공화국으로 바뀌는 거죠. 그렇게 안 하면 동네 사람들이 다 죽으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얼굴 예쁜 아낙네들도 다 잡아가서 지들 부인으로 삼고… 알고 보니 너무 불쌍한 처지인 거예요. 민간인들이 참 고통을 많이 겪었죠.”

그 후 조만철 씨가 소속된 부대는 동부 전선에 위치한 양양으로 이동을 하였다. 양양에서 그는 884고지에 배치되었고 그곳에서 근무하다 휴전을 맞이했다.

한국에 남기로 결정하다

휴전 후에도 조만철 씨는 제대를 하지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안 그는 삼촌과 함께 귀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 계셨지만 어머니는 광복 후 한국으로 들어와 종부로서 전라도 강진에서 시부모님, 즉 조만철 씨의 조부모를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휴전 후 군대에서 첫 휴가를 받은 그는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어머님을 뵐 수 있었다.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는 1965년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된 후에 만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재일학도의용군으로서는 가장 긴 1967년까지 군복무를 하다가 소령으로 제대하였다.

가업을 잇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학생이 한국에서 이렇게 오래 군복무를 하게 될 줄은 자신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스물일곱에 인연을 만나 결혼하고 한국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지만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전우들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 때 일본으로 귀환 못한 300여 명 중에서 130명 정도가 실종 아니면 전사를 했죠. 전사자들은 일본에 있다가 다시 모셔 와서 지금은 동작동 현충원에 계세요. 우리가 연례행사로써 현충일하고 동지회 시무식, 종무식 할 때에 꼭 참배를 합니다. 그렇지만 실종된 사람도, 전사한 사람도 너무 불쌍합니다. 그 사람들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한국에도, 일본에도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전사했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보상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제사 지내주는 사람도 없고… 헛된 죽음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 조만철 씨가 그렇게 애통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죽음은 전쟁의 기억과 함께 잊혀져가고 있다. 사실 그들의 조국 대한민국이 이렇게 당당히 존재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재일학도의용군들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조국을 생각했던 그 마음을 잊어버린다면 그 영혼들은 고향에 돌아와서도 쓸쓸할 것만 같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결국 우리 후손들에게 달린 문제라는 사실이 새삼 어깨를 무겁게 한다.

최연소로 참전했던 조승배
열여덟의 나이로 참전하다

조승배 씨는 중국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중국에 위치한 일본기관의 물자조달 관련 부서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가족들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6·25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다. 당시는 중학교 5학년을 마치면 대학 예과로 들어갈 수 있어 조승배 씨는 일찍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 명치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농업국가였던 조국에 기여하길 바라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농학을 전공하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대학생으로서 한국 유학생들과 교류했던 조승배 씨는 당시 북한을 지지하는 청년들과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청년들의 대립이 심각했다고 회상했다.

“제가 다니던 명치대학에서 한국학생들이 학생회의를 하다가 몸싸움이 벌어져서 북한을 지지하는 좌경학생들이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한국학생동맹 소속 청년을 의자로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고 얼마 안 되서 6·25가 터졌거든요. 우리들 사이에서는 그 사건이 큰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당연히 조승배 씨도 친구들과 함께 참전을 결심하게 되었다. 한국이 공산화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가족들은 당연히 처음에는 반대했다.

“저희들이 자원할 당시 매일같이 전황을 보면 점점 남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죠. 상황이 그러니 죽으러 간다는 것밖에 더 됩니까. 그래도 끝까지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부모님이 ‘그럼 할 수 없구나. 그래 좋다, 몸조심하고 끝까지 열심히 해봐라.’ 하셨죠. 그 땐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저 자신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급박한 상황이었고 우리는 당연히 낙동강 전선으로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인천으로 갈 줄은 전혀 몰랐죠.”

미군 탄약부대에서 활동하다

조승배 씨는 1진으로 왔다.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은 것도 아니고 나이가 어려 전쟁이나 군대에 대한 경험도 전혀 없었던 그는 배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투에 필요한 몇 가지를 조금 익힌 정도였다.

“인천 먼 바다에다 배를 세워놓고… 망 같은 것이 있어요, 그걸 타고 내려오는데, 익숙하지 않으니 그것도 힘들더군요. 방어하는 인민군들은 거의 없었어요. 다 낙동강 전선으로 내려간 상태였고 또 상륙하기 전에 포를 많이 쏘았거든요. 거기 있던 인민군들은 부평으로 다 도망갔죠. 우리도 그 쪽으로 진격했어요. 매복해 있는 인민군에게 아군이 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무사히 부평에 도착했죠.”

상륙작전 당시 포격이 가해지고 있는 인천 앞바다

부평에 도착한 조승배 씨는 미군 제3기지 사령부 탄약부대에 배속되었다고 한다.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을 도와 탄약을 나르던 부대여서 그런지 백인이 없고 200~300명 정도의 대대원이 대부분 흑인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재일학도의용군 30명 정도가 배속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저희들이 한 일은 폭탄이나 탄약을 최전방에 보급해 주는 일이었어요. 폭탄을 어디서 가져 오냐면 김포가 비행장이었거든요. 모든 물자가 거기서 와요. 부평 부대에서 출발해서 김포에 가서 포탄을 실어서 개성, 고랑포 쪽으로 가는 거예요. 최전방으로 가서 내려주고 다시 돌아오는 거죠. 기습을 많이 당하는 위험한 임무였어요.”

미군 대원들은 부대 내에서도 나이가 어렸던 그를 무척이나 아껴주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조국 전선까지 자원해서 온 앳된 얼굴의 동양 소년이 아마도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저보고 어리다고, 주니어라고 귀여워해줬죠. 흑인들이 참 인간적입니다. 제가 아무것도 못 받은 거 알고 그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저한테 줬어요. 그리고 총도 한 자루 쥐어주면서 넌 어리니까 혹시 다치거나 하면 안 된다고 꼭 가지고 있으라고…”

그 후 중공군으로 인해 1·4후퇴가 시작되자 그의 부대도 이전을 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차를 탔어요. 그냥 짐 싣는 차에 100여명 끼어 탔어요. 얼마나 추운지 지금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레이숑(ration, 군대의 휴대식량)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가지고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청량리에서 대구까지 가는데 일주일이나 걸렸습니다. 언덕에 가면 기차가 안 갑니다. 사람들이 내려서 전부 밀어야 되요. 동력이 모자라서 못 올라가는 거예요.”

전쟁 중에 찾아온 겨울은 그렇게도 혹독하고 매서웠나 보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한 가난하던 시절에 전쟁을 치러내야만 했던 이들의 치열함과 고달픔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의 부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다시 김해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김해에 주둔해 있던 그의 부대는 1952년에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기지로 철수하기로 결정이 났다. 부대에서는 같이 가겠냐고 물었지만 조승배 씨는 거절했다. 왠지 그들을 쫓아가면 가족을 다시는 못 만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게 제대를 결심한 그를 미군은 김해의 한 파병대에 데려다 주고 철수를 하였다. 재일학도의용군도 5명 정도 같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소속이 없어진 그는 이리저리 방황을 하다가 우연히 부산 소림사에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렇지만 조승배 씨가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귀환이 막혀버리고 난 상태였다. 밀항을 하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왠지 꺼림칙하게 느껴졌던 그는 밀선을 타지 않았다. 그 후 조승배 씨는 서울로 와서 지인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가 국가의 주선으로 미군에 취직을 할 수 있었고 가족들도 만나는 등 순조롭게 한국에 정착하는 듯 했다.

두 번째 조국의 부름, 북송저지공작대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특별한 제안이 들어오게 된다. 일본에서 북한으로 가는 재일동포들의 북송을 저지하는 임무였다.

“잘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이 오더니 ‘가시죠.’ 하는 겁니다. ‘왜 이러느냐?’고 했더니 ‘얘기할 일이 있다.’면서 치안국에 데리고 왔어요. 그 때 재일학도의용군 41명이 북송저지대로 선발되었어요. 특히 저는 사람들과 잘 친해지는 편이어서 일본에 아는 사람이 무척 많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목되어서 선발대로 가게 됐습니다.”

특수훈련을 받고 북송저지공작대로 일본에 투입된 이들은 모두 66명. 그러나 자유당 정권 때 파견된 이들은 이후 정권이 바뀌고 당시 북한과 북송 관련 협약을 체결한 일본 정부가 한국의 공작대 침투 첩보를 입수하면서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조승배 씨는 한국으로 돌아오려는 배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북송을 저지하기 위한 한국의 특무공작대가 일본에 침투했다는 내용의 기사

“오무라 수용소에서 재판을 받고 1년 징역을 받았어요. 특수훈련을 받았으니까 취조를 해도 다들 견뎠는데 한 사람이 참다못해 다 말해버린 거죠. 며칠을 두고 잠 안 재우고, 안 먹이고, 밤에만 끌어다가 집중적으로 똑같은 얘기를 매번 묻고 그러니깐 견디지 못했던 거죠. 다행히 징역 기간은 6개월 정도로 줄었지만 수용소 시절까지 합치면 1년을 감옥에 있었던 거죠. 당시 수용소에서 가까운 형무소로 이송이 되었데, 그곳이 일본에서 가장 위험한, 주로 사형수들이 가는 그런 곳이었어요.”

처음에 조승배 씨는 사형수들과 함께 방을 쓰면서 두려움과 불안함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인지라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며, 글을 모르는 사형수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며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감옥은 정말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의심이 들고 막 그런 곳이죠.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요. 정말 무서운 곳이었어요.”

그렇게 감옥에서 고생하던 공작원들은 5·16이 일어난 후 겨우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자유당 시절과는

수행해서 인정을 받았다. 당시 일본어를 잘 모르던 직원들이 ‘북한’이나 ‘김일성’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무조건 서적을 오려버렸던 반면 그는 내용으로 판단한 후 함부로 삭제를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수사관에게 끌려가기도 했지만 내막을 자세히 설명한 후에는 오히려 칭찬을 받았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파란만장하게 보내버린 젊은 날을 안타까워하는 대신 정직하게 살아온 세월을 자랑스러워하는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열여덟 살 소년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살아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