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동기와 활약상 일화

모국에 대한 소중함이 남달랐던 우리는 오직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하였습니다.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이 조국 전선으로 달려오게 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속사정들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이는 부모님과 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떤 이는 아예 가족들에게 참전을 알리지도 않은 채 참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정이 제각각 달랐다 해도 참전목적은 모두 하나였다. 병역의 의무도 없는 이들이 참전을 자원했던 이유는 오직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타국에서 살고 있었기에 오히려 더 모국에 대한 애틋함과 소중함이 남달랐던 이들의 마음은 이미 자신의 안위가 아닌 조국으로 향해 있었던 것이다.

취재 현장에서 입대한 기자 김성욱 씨 이야기

1950년 9월 8일 도쿄 스루가다이 호텔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날은 바로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이 도쿄 인근의 사이타마현 아사카에 있는 미 8군 보충훈련소로 입대하는 날이었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려는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들었고, 출정식이 열리는 스루가다이 호텔 앞에는 이미 미군 트럭 네 대가 도착해 있었다. 출정식은 주일한국대표부 김용주 공사의 격려사로 시작했다.

“병역의 의무도 없는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이 오로지 조국을 위해 학업과 생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현해탄을 넘어 조국 땅으로 달려가는 호국정신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들의 앞날에 무훈과 영광이 있길 바랍니다. 영웅주의적인 생각을 버리고 서로 합심하여 끝까지 잘 싸워서 조국을 지키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십시오.”

흰색 와이셔츠와 검은 색 양복바지 차림에 사각모를 눌러 쓴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 다독이거나 기합을 넣어주기도 하고 가족과 흐느끼기도 하였다. 오사카에서 동포들을 대상으로 발행되던 신세계 신문의 기자인 김성욱은 이 장면들을 놓칠 새라 열심히 수첩에 옮겨 적고 있었다. 간단한 출정식이 끝나 어디선가 대한민국 ‘건국행진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장내는 젊은이들의 우렁찬 합창 소리로 가득 찼다. 너나 할 것 없이 행진곡을 따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김성욱은 가슴 한 구석이 꽉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동년배 친구들은 조국을 구하겠다며 결의를 다지고 있는데 나는 한가로이 뭐하고 있나’라는 자책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는 원고지에 기사를 써내려가던 도중 펜을 놓았다. 그리고 자원출정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께 미처 연락도 드리지 못한 채 즉석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김성욱은 깨달았다. 기자는 언제라도 다시 할 수 있는 직업일 뿐이지만 나라를 잃는 것을 그냥 두고 본다면 평생의 한이 되리라는 것을.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자원서를 쓰고 미군 트럭에 올라탔다.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애통하고 고통스러우며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에게 조국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던 것이다.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참전한 김교인, 조기남 씨 이야기

참전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김교인은 18세라는 어린 나이로 당시 오사카에 있는 오촌 당숙 집에 머무르면서 이쿠노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민단 자원병지도본부에서 한국전에 참전할 자원병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바로 참전을 결심하였고, 당숙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그러나 당숙은 펄쩍 뛰며 허락해 주지 않았다.

“며칠을 두고 계속 허락해 달라고 졸랐지만 당숙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당숙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그때는 조국을 지키는 일에 동참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혼자서 몰래 도쿄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자원병지도본부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김교인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요청했고 결국 입대를 허락받았다. 막상 입대를 허락받았지만 도쿄에 머물 곳이 없었던 그는 민단 중앙본부 숙직실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다. 당시 그곳에는 그와 비슷한 사정을 가지고 있던 젊은이들이 여러 명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당시 같은 고등학생 신분이었던 조기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조기남은 수소문 끝에 찾아온 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조기남의 아버지는 하던 공부를 끝내고 나서도 얼마든지 조국에 헌신할 기회가 있다고 하시면서 애걸복걸하는 그를 억지로 데리고 가셨죠. 그렇지만 미군 부대에 입대하기 위해 트럭에 탔는데 글쎄 그가 우리보다 먼저 거기에 있는 겁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씩 웃으며 아버지 몰래 도망쳤다고 하더군요.”

아직 고등학생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자식들을 전쟁터로 보냈던 부모님들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했겠는가. 그러나 아직은 철없을 나이 18세에 이들은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겠다고 결심했다. 인생이 아직 꽃피기도 전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결심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확고한 것이었다.

아버지 몰래 참전한 독자 신효근 씨 이야기

규슈 지방에 살고 있던 신효근은 집안의 독자였다. 그는 6·25전쟁 발발 후 조국전선에 참전할 자원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민단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집안의 대가 끊길 수도 있는 참전을 아버지가 허락할 리 만무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에게 참전하겠다고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다가는 집안의 대를 끊는 불효자가 되고 싶냐고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집안의 대가 끊어지는 것은 한 집안의 불행이지만 나라의 운명이 끝난다면 민족 전체의 불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던 신효근은 지원서를 몰래 제출하고 출발 전날까지도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날, 아버지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효근은 아버지를 치료하러 왕진을 온 의사에게 당장 떠나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주사약에 수면제를 조금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 거절했지만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아버지가 잠드는 모습을 지켜본 후 집을 나온 그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지에게 아버지가 깨어나면 사실을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한 후 친구인 김태윤, 최광선 등과 함께 오이타현 벳부에 있는 미군 훈련소인 캠프 모리로 향했다. 잠에서 깨어나 슬퍼할 아버지를 생각하면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그는 조국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참전 지원서를 제출한 청년들은 각자의 마음에 큰 고민과 아픔을 안고서도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조카와 삼촌이 함께 참전한 조용갑, 조만철 씨 이야기

조용갑과 조만철은 한 집에서 한 사람이 지원하기도 어려운 형편에 조카와 삼촌이 함께 지원한 보기 드문 경우였다. 본래 자원병임시사무소를 운영했던 건국촉진청년동맹에서 열혈 청년으로 활동했던 조용갑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원래 건청에서 활동했던 터라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참전을 선택하게 되었지만 조카가 지원한다고 하니까 삼촌 입장에서 마음이 걸리더군요. 더구나 조카는 우리 집안의 종손이라 더 조심스러웠어요. 나이도 저보다 더 어리고 해서 데리고 오지 않으려고 한참이나 설득했지만 저도 가겠다고 자꾸만 고집을 부리는 통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집안 전체에서 반대를 하니까 일주일 동안이나 밥도 먹지 않고 단식투쟁을 한 끝에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결국 형님 내외도 포기하시고 말았지요.”

이러한 사정으로 결국 조용갑의 집에서는 삼촌과 조카가 나란히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들은 오사카에서 열차편으로 도쿄로 이동한 후 재일학도의용군 2진으로 한국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후에 이들은 육군본부에서 제안한 간부후보생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3월 10일 재일학도의용군 24명이 포함된 육군종합학교 22기생의 졸업식 및 임관식에서 삼촌과 조카가 서로의 어깨에 계급장을 달아주는 풍경이 연출되게 되었다. 이렇게 소위에 임관된 후 조용갑은 국군 3사단 직할 부대였던 대전차공격대대의 2중대 화기 소대장으로, 조만철은 국군 11사단 제9연대의 화기중대인 8중대의 소대장으로 배속되어 조국을 위해 함께 선전하게 된다.

일본인들도 만류했던 양옥룡, 강대윤 씨 이야기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양옥룡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게이오대학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인 앞날이 창창한 대학생이었다. 4남 1녀 중 막내였던 그는 눈물로 호소하는 누님과 대학교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원했다. 사실 양옥룡은 이미 전쟁터에서 한번 죽었다 살아난 몸이었다. 그는 해방 전 중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군특별지원병으로 일본 해군에 강제 징집되어 전쟁터에 끌려갔다. 그가 돗토리현 해군비행장에서 약 1년 가까이 복무하고 있던 중에 미군 공격이 거세져 일제는 가미카제까지 동원하여 최후의 방어전을 펼치게 되었다. 양옥룡은 미국 군함을 공격하기 위해 대만해협으로 출동한다는 부대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 놓은 상태에서 극적으로 해방을 맞았다. 그래서 그에게 광복이 주는 의미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각별했다.

“일본인 교수들까지 전쟁에 미쳐 날뛰던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공학도들만은 전쟁터로 내몰지 않았다고 하면서 저를 간곡하게 만류하더군요. 꼭 총을 들고 싸워야만 애국이냐고, 그러지 말고 하던 공부를 계속하여 학문과 지식으로 조국의 재건에 공헌하는 것이 더 큰 애국 아니겠냐고 하였지만 그런 말들이 제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인 병원에서 근무했던 강대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가족을 두고 일본으로 건너와 일하고 있던 강대윤이 입대 의사를 밝히자 일본인 병원장을 비롯하여 병원 식구들은 모두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 전날 꿈속에서 전쟁으로 신음하는 고향 산천과 친구, 친지들을 보고 깨어나 바로 참전을 결심한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일본인들은 대부분 태평양 전쟁 때 가까운 사람들을 전쟁터로 보내야만 했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렸던 것이죠. 그렇지만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군인으로 출세를 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현해탄을 건너는 즉시 전쟁터에서 죽을 지도 모르고 살아남는다 해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 나라와 고향 산천이 공산당에게 짓밟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지금 가지 않고 편안하게 지낸다면 평생 가슴에 후회가 남을 것이다.’ 그랬더니 그들도 제 심정을 이해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이처럼 재일동포 청년들의 참전은 가족들 뿐 아니라 일본인들까지도 이들의 미래를 안타까워하며 만류했던 위험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재일동포 청년들은 위험에 처한 조국을 향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용감하게 참전을 결심하였다.

결혼한 몸으로 지원했던 조종규, 한동일 씨 이야기

일본 와카야마시에 있던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하던 조종규는 부산에서 농사를 짓다가 돈을 벌기 위해 아내와 부모님을 고향에 두고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온 처지였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 발발 소식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아내와 부모님이 계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참전하여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리고 2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싸우다가 2년이 지나서야 겨우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외동아들이었던 그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을 너무나 놀랐다고 한다.

오사카에서 지원한 한동일의 경우는 반대로 아내와 생이별을 감수하고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4월에 결혼한 그는 6·25전쟁 당시 신혼의 재미에 푹 빠져 있을 때였지만 전쟁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바로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출전 통보가 오자 부인에게 자신의 참전 결심을 알렸다. 아내는 울면서 말렸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그는 막무가내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형님이 ‘그렇게 전쟁터에 나가고 싶으면 제수씨도 데리고 가라’고 호통을 치며 말렸지만 그는 결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특히 부모님이 한국에 있었던 그는 만약 부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일본에 편안하게 머물렀던 자신은 하늘을 떳떳하게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 하나 믿고 시집온 집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떠났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아쉽습니다.”

그렇게 아내에게 제대로 따뜻한 위로도 하지 못하고 입대했던 한동일은 1·4 후퇴 당시 철수하던 미군과 함께 일본으로 귀환을 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예기치 못하게 귀환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차에 집에 들른 한동일은 깜짝 놀랐다. 아내가 만삭의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참전하려는 결심을 굽히지 않고 다시 도쿄 집결소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형님이 찾아와 ‘애비 얼굴도 모르는 자식을 만들 셈이냐. 가더라도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가라.’며 설득했다.

자식이 태어난 후에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희생하였던 그의 결심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하기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