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양옥룡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게이오대학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인 앞날이 창창한 대학생이었다. 4남 1녀 중 막내였던 그는 눈물로 호소하는 누님과 대학교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원했다. 사실 양옥룡은 이미 전쟁터에서 한번 죽었다 살아난 몸이었다. 그는 해방 전 중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군특별지원병으로 일본 해군에 강제 징집되어 전쟁터에 끌려갔다. 그가 돗토리현 해군비행장에서 약 1년 가까이 복무하고 있던 중에 미군 공격이 거세져 일제는 가미카제까지 동원하여 최후의 방어전을 펼치게 되었다. 양옥룡은 미국 군함을 공격하기 위해 대만해협으로 출동한다는 부대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 놓은 상태에서 극적으로 해방을 맞았다. 그래서 그에게 광복이 주는 의미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각별했다.
“일본인 교수들까지 전쟁에 미쳐 날뛰던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공학도들만은 전쟁터로 내몰지 않았다고 하면서 저를 간곡하게 만류하더군요. 꼭 총을 들고 싸워야만 애국이냐고, 그러지 말고 하던 공부를 계속하여 학문과 지식으로 조국의 재건에 공헌하는 것이 더 큰 애국 아니겠냐고 하였지만 그런 말들이 제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인 병원에서 근무했던 강대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가족을 두고 일본으로 건너와 일하고 있던 강대윤이 입대 의사를 밝히자 일본인 병원장을 비롯하여 병원 식구들은 모두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 전날 꿈속에서 전쟁으로 신음하는 고향 산천과 친구, 친지들을 보고 깨어나 바로 참전을 결심한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일본인들은 대부분 태평양 전쟁 때 가까운 사람들을 전쟁터로 보내야만 했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렸던 것이죠. 그렇지만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군인으로 출세를 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현해탄을 건너는 즉시 전쟁터에서 죽을 지도 모르고 살아남는다 해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 나라와 고향 산천이 공산당에게 짓밟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지금 가지 않고 편안하게 지낸다면 평생 가슴에 후회가 남을 것이다.’ 그랬더니 그들도 제 심정을 이해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이처럼 재일동포 청년들의 참전은 가족들 뿐 아니라 일본인들까지도 이들의 미래를 안타까워하며 만류했던 위험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재일동포 청년들은 위험에 처한 조국을 향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용감하게 참전을 결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