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7사단에는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이 다른 단위부대보다 훨씬 많은 120여 명 가량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과 동해안의 이원상륙작전,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진 혜산진과 장진호 전투를 치르면서 이들 재일학도의용군 중 무려 83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흥남까지 이어진 철수작전 도중 막대한 피해를 입은 7사단에서 재일학도의용군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재일학도의용군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이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줄곧 미군에 배속되어 미군 병사들과 전투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번조차 부여받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군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정확한 실종 또는 전사지역이 확인되기 힘들었다. 그 때 실종 처리된 재일학도의용군들 중에는 후에 남으로 귀환하거나 휴전 후 포로교환 때 돌아온 사람들이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전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휴전 후 오랫동안 실종자로 처리되어 있던 이들은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반세기가 가까워오는 1992년 11월 19일에 이르러서야 육군 본부에 의해 전사자로 확정 처리되었다. 그리고 1993년 3월 24일에 이들 83위의 전사자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봉안할 수있었다.
이처럼 군번도 없이 낯선 조국 땅에서 젊은 목숨을 바친 83명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그 누구보다도 용감한 군인이었다. 살아남은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은 비록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이지만 동지들의 넋을 모실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하며 먼저 간 동료를 추모했다.
철수 도중 희생된 7사단 83명의 소속부대와 명단은 다음과 같다.
<미 제7사단 17연대>
강위수, 강희수, 권창환, 감광래, 김선수, 김암이, 김영수, 김장옥, 김정두, 도기찬, 박용문, 백영근, 서기순, 손상달, 송영석, 손호준, 신현, 이말학, 이영근, 이양모, 이재천, 장달봉, 장중동, 정석수, 조병순, 조휘성, 최양진
<미 제7사단 31연대>
공형근, 김금태, 김봉상, 김영식, 김재봉, 김정현, 김태인, 김중, 박재호, 박정문, 박용태, 박태현, 손찬순, 성재숙, 송재옥,이기수, 이봉수, 이상근, 이이도, 이천희, 장옥기, 정수치, 정태진, 정해당, 진재식, 최병종, 한영교, 황순언, 황태용
<미 제7사단 32연대>
강재오, 김군복, 김덕수, 김부사, 김병기, 김순용, 김연홍, 박노식, 방영욱, 신성백, 신정희, 엄강영, 오동수, 유광식, 유삼웅, 유신오, 윤명근, 이선기, 이용홍, 조기옥, 조명석, 주수회, 최길웅, 최용덕, 한동춘, 한창운, 홍조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