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동기와 활약상 일화

642명의 영웅, 재일학도의용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단일부대를 이루지 못하고 국군과 미군의 각 부대에 뿔뿔이 흩어져 전투에 참가했다.
따라서 아쉽게도 6·25전쟁을 기록한 수많은 전쟁사에서도 재일학도의용군만의 활약상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 전역에서 지원하여 서로 얼굴도, 신원도 잘 모르는 상태였고, 더욱이 군번도 받지 못한 채 전투에 참여한 의용군들은 기록을 확인할 길이 없다. 전쟁에서 생존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의 회고와 증언에 따른 얼마간의 기록이 있어 여기에 옮기지만, 이외에도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재일학도 청년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국군 1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

6·25전쟁 중반 무렵 국군 1사단은 서울 서북방 쪽 임진강 유역에서 중공군과 밀고 밀리는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국군 1사단에는 재일학도의용군 출신 김재진, 김진수, 배명암, 송동원, 신영옥, 심재연, 정상옥, 홍경학 등이 배속되어 있었고, 육군종합학교 22기를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한 이상봉 또한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한 심재연 씨 이야기
심재연은 국군 1사단 11연대 1대대 수색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수색대의 주요 임무는 적지에 침투하여 적의 현황을 파악하고 포로를 생포하며 매복을 하는 등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심재연은 우리말이 서투름에도 불구하고 고랑포 작전, 임진강 도하작전 등에서 항상 최전선에 나서는 등 열성을 다해 전투에 임하는 대원이었다.
귀환을 거부하고 국군에 다시 입대한 송동원 씨 이야기
송동원은 국군 1사단 15연대 3대대 9중대에 배속되어 활동했다. 처음에는 미 3사단 소속이었던 그는 함경도 영흥에서 전투 도중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자 갑자기 제대하라는 미군의 명령을 받았다. 거세게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자 그 길로 바로 국군 1사단으로 달려가 미군부대 사격대회에서 1등을 하고 받은 표창장을 보여주며 입대시켜 달라고 우겼다.
의무대로 활동한 신영옥 씨 이야기
국군 1사단에는 위생병으로 복무한 사람들도 있었다. 제11연대 제3대대 의무대에는 신영옥, 배명암, 홍경학이 함께 배속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모두들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신영옥은 특히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기도 하였다. 그는 타고난 성실함과 용기 뿐 아니라 넘치는 전우애로 총탄이 빗발치는 현장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열심히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소대장으로 활동한 이상봉 씨 이야기
육군종합학교를 22기로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한 이상봉은 국군 1사단 예하 11연대 1대대 2중대의 일선 소대장으로 배속을 받았다. 6·25전쟁 당시는 소대장들의 전사율이 굉장히 높았다. 오죽하면 배치된 지 3일 만에 전사한다고 해서 ‘3일 소위’라고 불리는 정도였다. 그만큼 소대장이라는 직책은 자기 한 몸뿐 아니라 소대원들의 안전과 생명까지 책임져야 하고 또 상관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부여된 어려운 자리였다. 이상봉 또한 처음에는 신임소대장의 자리가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재일학도의용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국군 2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

32연대 3소대 분대장으로 활약했던 박덕근 씨 이야기
재일학도의용군 박덕근은 1950년 11월 국군으로 편입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중 1952년 9월 금화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2사단으로 전속명령을 받고 32연대 수색중대 3소대 분대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당시 그가 속한 32연대는 저격능선 전투의 주공부대였다. 43일 동안의 고지 쟁탈전 동안 32연대의 피해는 전사 500명, 부상 1,800명을 넘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한다.

국군 3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

중동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3사단에는 육군종합학교 22기를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여러 명 배속을 받았다. 김성욱, 문성환, 윤용근, 이명규, 이철우, 이활남, 조용갑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1951년 3월 10일 수료식이 끝나자마자 대구에 있던 제1보충대대와 경북 안동을 거쳐 3월 14일경 국군 3사단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아침 사단장에게 부임신고를 함과 동시에 부대배치를 받았다.

대전차공격대대 2중대 화기소대장으로 활동한 조용갑 씨 이야기
조용갑은 사단 직할 부대였던 대전차공격대대의 2중대 화기소대장의 직책을 부여받았다. 당시 2중대에게 부여된 임무는 대관령 인근의 발왕산 정상 부근에 있는 적 사단 사령부의 위치를 알아내는 수색임무와 패잔병들을 소탕하여 적을 완전히 몰아내는 작전이었다. 조용갑이 지휘하는 화기소대는 수색작전을 펼쳤고 주력부대가 북으로 후퇴한 후 낙오해 버린 인민군들을 생포하였다. 그리고 바로 적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유천리로 이동하여 포위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18연대 1대대 2중대 소대장으로 활동한 김성욱 씨 이야기
김성욱은 국군 3사단 18연대 1대대 2중대의 소대장직을 부여받았다. 그가 배속될 당시 18연대는 오대산 월정사 부근에 있었다. “중대에 도착해 보니 캄캄한 밤이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새벽 5시에 오대산 노인봉을 탈환하는 전투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소대원들 얼굴 익힐 틈도 없이 전투에 바로 투입되었습니다. 소대 선임하사로부터 인원현황만 간단히 보고받고 땅바닥에 누웠는데 긴장감으로 잠이 올 리 만무했죠. 그날따라 밤하늘의 별은 유난히 초롱초롱 빛나더군요.”
대전차공격대대 1중대 소대장으로 활동한 이활남 씨 이야기
3사단에 배속된 이활남은 조용갑과 같은 대전차공격대대 1중대 소대장으로 배속 받았다. 처음 이활남이 배속되었을 때 그는 신임 장교들을 대표해서 인사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인사말을 하자마자 중대원들 사이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웅성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서투른 한국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대장이 그를 일본에서 징집영장도 받지 않고 자원한 재일학도의용군이라고 소개하자 중대원들은 웃음을 거두고 그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모두들 꺼려하는 전쟁터에 스스로 찾아온 사람에 대한 경의와 존경의 표시였다.
22연대 3대대 10중대 3소대장으로 활약한 윤용근 씨 이야기
윤용근은 22연대 3대대 10중대 3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3사단은 가리봉에서 원통리까지 이어진 서쪽 능선에 방어선을 치고 있었고, 윤용근이 속한 3대대는 좌전방 대대로 1226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국군 6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

7연대 소총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윤호태 씨 이야기
윤호태는 육군종합학교를 마치고 국군 6사단 7연대의 소총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있기 전 국군 6사단은 강원도 사창리 일대에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6사단은 신병 보충과 충분한 보급품의 지급으로 그 어느 때보다 사기가 충천해 있는 상태였다. 6사단은 크리스마스 공세 때 적에게 당한 것을 설욕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1개 사단 병력으로 사단 전면에 배치된 60,000명이 넘는 중공군을 상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전투경험이 풍부한 팔로군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중공군은 야간전투에 능하였다. 중공군은 아군의 방어선 중 돌파하기 어려운 곳은 피하고 대신 우회하여 취약한 부분을 택해 집중공격하는 전술을 택하고 있었다.

국군 8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

21연대 수색중대에서 활약한 이종범 씨 이야기
국군 8사단 21연대 수색중대에는 이종범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는 재일학도의용군만의 부대였던 3·1독립보병대대 해산 이후 국군에 편입하여 부산의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후 당시 제주도에 있던 제2훈련소 교도연대 화기학과 중화기반 조교로서 신병들의 교육훈련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방에서 전투요원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방근무 자원을 신청했다. 당시 많은 군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최전방보다는 생명의 위협이 덜한 후방으로 전출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남들 같으면 최고의 보직이라고 생각하는 훈련소 근무를 사양하고 자원하여 전방으로 가려는 그를 주위에서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조국을 지키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던 그는 결국 국군 8사단에 배속되어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국군 9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

9사단에 배속된 재일학도의용군으로는 30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장으로 부임했던 유승호 이외에 김영은, 명덕일, 박덕철, 신효갑, 이완공, 이창진, 장덕준, 최성규 등 많은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최성규 씨 이야기
최성규는 미군에 있다가 국군 9사단으로 편입되어 전쟁을 치렀다. 특히 그는 인민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오는 혹독한 경험을 치렀다. 전투에 참가했다가 인민군에게 생포되는 신세가 된 최성규는 인민군 부대에 억류되어 있었다. 당시 인민군도 전황이 다급한 상황이라 그를 포로수용소로 후송시킬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적의 지휘관이 그를 즉결처형하지 않고 살려둔 것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30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장으로 활약한 유승호 씨 이야기
유승호는 9사단 30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장으로 배속받았다. 당시 30연대 본부는 강릉에서 약 8km 떨어진 구산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1951년 5월에 접어들면서 공산군은 4월 춘계공세 때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과 물자의 보충을 끝내고 공격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사단 사령부에서는 적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30연대로 하여금 인민군 32사단 2연대가 점령하고 있는 매봉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승호에게는 소대장으로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참가하는 연대 규모의 작전이라 사뭇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병대로 활약한 재일학도의용군
9사단 공병대에는 일본에서 부산으로 건너와 바로 국군에 입대한 김영은, 명덕일, 박덕철, 신효갑, 이완공, 이창진, 장덕준, 최성규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미군부대를 거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바로 부산 범일동에 있던 육군 제2훈련소를 거쳐 대전에서 창설된 9사단의 공병대대에 배속되었다.

국군 11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

9연대 화기중대 소대장으로 활약한 조만철 씨 이야기
육군종합학교를 마친 조만철은 국군 11사단 제9연대의 화기중대인 8중대의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한지 두 달 뒤인 1950년 8월 27일 경북 영천에서 창설된 11사단은 당시 지리산의 인민군 패잔병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조만철은 부임하는 즉시 밤낮과 전선이 따로 없는 공비토벌작전에 6개월 동안 투입되었다.

미 3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

미 3사단은 미 1해병사단, 미 7사단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미 10군단의 예하부대로 1950년 9월 30일 서울에서의 작전임무를 미 8군에 인계하고 새로운 작전인 원산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 3사단에는 주로 캠프 모리에서 훈련을 받은 카투사 군번의 재일학도의용군 4진이 소속되어 있었다.

의무대로 활동한 강대윤 씨 이야기
강대윤은 미 3사단 의무대대 의무중대에서 활동하였다. 직접 전투부대에 소속되어 총을 들고 적과 싸우고 싶었지만 일본 병원에서 근무한 경력을 고려한 미군 측에서 위생병으로 배속시켰던 것이다. 그는 보병으로 참전하게 해달라고 사정하였지만 보병 못지않게 위생병의 임무도 중요하다는 미군 측에 의해 거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위생병 교육을 끝낸 그는 이동하는 부대를 따라 고쿠라항에서 승선했다.
통역병이지만 전투에 참전했던 신효근 씨 이야기
미 3사단 15연대 2대대에서는 신효근이 대대본부 통역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원산에 상륙한 부대를 따라 후퇴하는 적을 격퇴하며 북진을 계속하다가 뜻밖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이동을 한다. 부산에 도착한 그의 부대는 경주에 잠시 주둔하다가 1951년 1월 2일경 이동명령을 받고 전방으로 이동 중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일대에서 중공군과 약 20일간 대치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용인 인근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중공군과 대접전이 붙게 되었다. 인해전술을 내세우며 돌격전을 감행하는 중공군들에게 아군이 화력을 집중적으로 퍼부어대자 결국 중공군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막대한 손해를 입은 채 공세를 멈추었다. 이후에도 그의 부대는 1951년 3월 서울에 입성한 후 개성을 목표로 전진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의정부에서 적에게 포위된 영국군 구출 임무를 부여받고 적과 아군도 구분할 수 없는 야간에 백병전을 치러야만 하는 처절한 사투를 치르기도 했다.
오이타에서 참전한 재일동포 2세 김재생 씨 이야기
미 3사단에 배속되어 전쟁에 참가했던 김재생은 일제 강점기 시절 오이타에서 태어나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 재일동포 2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전에 자원하는 것이 한민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50년 11월 원산상륙작전에 투입되는 것을 시작으로 조국 땅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된다.

미 7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

미 3사단과 함께 미 10군단의 예하부대였던 미 7사단에는 다른 부대보다 많은 약 120여 명 가량의 재일학도의용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통일을 눈앞에 두고 철수해야 했던 박진우 씨 이야기
박진우를 포함한 미 7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1950년 10월 말 부산에서 미군 수송선에 승선했다. 무려 50시간이 걸린 지루한 항해 끝에 부대가 상륙한 곳은 함경남도 이원이었다. 이원에 상륙한 부대는 적의 뒤를 쫓아 풍산으로 진격했고 박진우가 배속된 중대는 큰 도로를 피해 험준한 산맥을 타고 이동하면서 주민들에 대한 검색과 패잔병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11월 초 이미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 야전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장병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미 7사단은 북진을 계속했다. 이제 조금만 더 북진하면 공산군을 몰아내고 완전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에 벅차 모든 것을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31연대에서 활약했던 우지식 씨 이야기
미 7사단 31연대에는 우지식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가 소속된 31연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원에서 주둔하다가 부대 이동명령을 받고 부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다시 이원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이후 백산 일대에서 1개 대대 규모의 적과 교전한 결과 약 5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 때 적군을 확인해 본 결과 인민군이 아닌 중공군임을 알게 되었다. 한편 아군은 장진호와 부전호 부근에서도 중공군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수세에 몰린 북한군이 중공군의 참전을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아군은 북진을 멈추지 않았다.
군번조차 받지 못한 채 전사한 83명의 동지들
미 7사단에는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이 다른 단위부대보다 훨씬 많은 120여 명 가량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과 동해안의 이원상륙작전,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진 혜산진과 장진호 전투를 치르면서 이들 재일학도의용군 중 무려 83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흥남까지 이어진 철수작전 도중 막대한 피해를 입은 7사단에서 재일학도의용군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박두원 대위와 그 밖의 재일학도의용군

조국의 창공에서 산화한 박두원 씨 이야기
재일학도의용군 중에는 일본군에서 항공병으로 복무했던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박두원, 박연규, 박청남, 이규달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박연규, 박청남, 이규달 등은 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졸업한 후 하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항공대에서 복무했던 경력을 살려 육군본부 작전국 항공과로 전출하여 육군항공대 창설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이규달은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중위로 임관하여 육군항공대에서 조종사를 양성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한편 박두원은 공군에 입대하여 공군 조종간부후보생 교육을 마친 뒤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어 활동했다.
전장 곳곳에서 조국을 지켰던 재일학도의용군들
단일부대를 이루지 못하고 군번도 받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싸우던 재일학도의용군들에 대해서 CBS 도쿄지국장 조지 하먼은 ‘유령’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 개의치 않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맡은 바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미 8군 예하 60부대에는 이종록을 비롯해 여러 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종록은 이후 미 3사단 수송대대에 전속되어 전투에 참가하였고 부대를 따라 이동하며 수송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흥남철수작전 이후에는 미 8군 포병대대로 전속하여 그곳에서 계속 복무하다가 1952년경 제대를 하였다.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한 심재연 씨 이야기

심재연은 국군 1사단 11연대 1대대 수색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수색대의 주요 임무는 적지에 침투하여 적의 현황을 파악하고 포로를 생포하며 매복을 하는 등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심재연은 우리말이 서투름에도 불구하고 고랑포 작전, 임진강 도하작전 등에서 항상 최전선에 나서는 등 열성을 다해 전투에 임하는 대원이었다.

그러던 중 1951년 5월경 심재원이 속한 수색대는 적 후방에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한다. 그런데 경계망을 뚫고 적지에 침투하여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적의 기습을 받아 그의 동료 한 명이 허벅지에 관통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대원들은 부상당한 동료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적들의 집중사격으로 도무지 접근이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재연은 목숨을 걸고 낮은 포복으로 다가가 부상당한 동료를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복귀 도중 다른 수색대원들과 떨어져 부상당한 동료와 함께 적진에 남게 된다. 전우를 혼자 두고 올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동료를 등에 업고 적진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적의 추격을 따돌리고 복귀한 심재원은 너무 탈진한 탓에 잠시 정신을 잃기도 하고 암호를 잊어버리는 등 위기를 맞았지만 마침 초소에 근무하던 같은 재일학도의용군에 의해 무사히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그는 문산에서 전투 도중 중공군 포로 19명을 생포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비록 우리말이 서툴러 공격신호와 철수신호를 분간하지 못하는 등 실수가 잦았던 그이지만 언제든 최전선에서 있는 힘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작전 도중 같은 재일학도의용군 출신인 김재진 전우의 죽음을 맞아 큰 슬픔을 겪었고 그의 빈자리에 괴로워하기도 했지만, 전우가 이루지 못한 몫까지 더 열심히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무사히 살아 돌아왔던 그도 수색작전에서 적에게 집중사격을 받아 부상을 입게 되었고, 이후 야전병원을 거쳐 육군병원으로 후송된 뒤에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부상으로 명예제대를 하였다.

귀환을 거부하고 국군에 다시 입대한 송동원 씨 이야기

송동원은 국군 1사단 15연대 3대대 9중대에 배속되어 활동했다. 처음에는 미 3사단 소속이었던 그는 함경도 영흥에서 전투 도중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자 갑자기 제대하라는 미군의 명령을 받았다. 거세게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자 그 길로 바로 국군 1사단으로 달려가 미군부대 사격대회에서 1등을 하고 받은 표창장을 보여주며 입대시켜 달라고 우겼다. 다들 목숨이 안전한 후방으로 빠지려는 마당에 전방으로 달려와 입대시켜 달라고 고집을 부리던 그를 보고 부대장은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자초지종을 듣고 나자 그를 흔쾌히 입대시켜 주었다. 처음에는 한국말이 서툴러 부대원들의 놀림을 받았으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적극적으로 최전선에 나서는 그를 보고 아무도 다시는 놀려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송동원이 배속된 부대는 1952년 말부터 노리고지와 베티고지, 105고지(임진강 지구)를 연결하는 방어선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으려는 치열한 고지쟁탈전에서 적 병력의 배치상황 등 관련 정보가 부족했던 지휘관은 수색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송동원은 어쩌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위험한 수색대 임무에 선뜻 자원했다. 그리고 적지에 침투한 그는 수색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을 뿐 아니라 중공군 2명까지 생포해 오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그는 휴전 직전까지도 전쟁터의 최전방에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휴전을 얼마 앞둔 장단 전투에서 적이 쏜 포탄의 파편을 온몸에 맞는 중상을 입는다. 워낙 부상이 심해 통합병원으로 후송하여 파편을 제거하는 수술을 여러 차례 받지만 머리와 가슴에 박힌 파편은 끝내 제거하지 못했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몇 달 만에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

머리에 박힌 포탄의 파편은 안타깝게도 그 후에도 제거하지 못했으며 그는 평생을 부상의 후유증을 견뎌야만 했다. 그렇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에 몸을 던진 그의 강인한 정신은 재일학도의용군의 기개를 널리 떨치게 했다.

노리고지와 베티고지 전투 약도

의무대로 활동한 신영옥 씨 이야기

국군 1사단에는 위생병으로 복무한 사람들도 있었다. 제11연대 제3대대 의무대에는 신영옥, 배명암, 홍경학이 함께 배속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모두들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신영옥은 특히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기도 하였다. 그는 타고난 성실함과 용기 뿐 아니라 넘치는 전우애로 총탄이 빗발치는 현장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열심히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1·4후퇴 당시 본래 보충대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신영옥은 전선의 상황이 다급해지자 위생병으로 차출되게 된다. 그리고 관련 교육을 받은 후 부대로 복귀하여 수색대의 의무병으로서 전장에 참가하게 되었다. 임진강 도하작전에 투입된 그의 부대는 강을 건너는 도중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눈앞에서 총상을 입고 절규하는 전우들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는 총탄이 빗발치는 현장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부상자들을 치료하였다. 죽음을 무릅쓴 그의 신속한 행동으로 인해 많은 전우들이 제때 응급조치를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신영옥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부상자들의 치료에만 온 신경을 쏟아 자신이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 진급한 것도 나중이 되어 서야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1952년 10월 리틀노리와 테시고지 방어작전에 투입되어 수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였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위생병으로는 드물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소대장으로 활동한 이상봉 씨 이야기

육군종합학교를 22기로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한 이상봉은 국군 1사단 예하 11연대 1대대 2중대의 일선 소대장으로 배속을 받았다. 6·25전쟁 당시는 소대장들의 전사율이 굉장히 높았다. 오죽하면 배치된 지 3일 만에 전사한다고 해서 ‘3일 소위’라고 불리는 정도였다. 그만큼 소대장이라는 직책은 자기 한 몸뿐 아니라 소대원들의 안전과 생명까지 책임져야 하고 또 상관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부여된 어려운 자리였다. 이상봉 또한 처음에는 신임소대장의 자리가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재일학도의용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던 중 1951년 4월 24일 국군 1사단 정면에 있던 중공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지 시작했다. 중공군은 취약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국군 1사단과 영국군 제29여단의 방어지역이 만나는 경계를 뚫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상봉이 속해있던 11연대는 즉각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많은 중공군을 포로로 잡았으나, 결국 인해전술에 밀려 파평산 고지를 적에게 내주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일주일동안 쉬지 않고 계속된 공방전 끝에 결국은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고랑포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이상봉은 일선에서 소대장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최일선 소대장으로서 상급부대의 작전명령에 따라 매복과 수색 그리고 역습 작전을 수행하였고 가장 앞장서서 나서면서도 항상 소대원들을 독려하며 대원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가장 큰 신경을 기울였다.

매일처럼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1952년 4월경 임진강나루 전투에서 또다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아군을 공격해 들어왔다. 아군은 결사적으로 진지를 방어했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방어선 일부가 무너지게 되었다. 결국 적과 아군을 구별할 수 없는 혼전이 벌어졌고 이상봉은 소대원들을 이끌고 치열하게 백병전을 치르며 진지를 사수하다가 큰 부상을 당하고 만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야전병원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상이 심한 탓에 응급치료를 마치고 곧바로 대구에 있는 제27육군병원으로 후송된 그는 다시 부산의 제5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채 끝나기 전인 1952년 8월경 결국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서부전선 임진강지구에서 전우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상봉 소위다.

32연대 3소대 분대장으로 활약했던 박덕근 씨 이야기

재일학도의용군 박덕근은 1950년 11월 국군으로 편입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중 1952년 9월 금화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2사단으로 전속명령을 받고 32연대 수색중대 3소대 분대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당시 그가 속한 32연대는 저격능선 전투의 주공부대였다. 43일 동안의 고지 쟁탈전 동안 32연대의 피해는 전사 500명, 부상 1,800명을 넘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박덕근은 소대장도 없는 상태에서 불과 20여명밖에 남지 않은 소대원들과 함께 여러 가지 작전에 투입되었고, 목숨을 건 사투 끝에 결국 아군은 저격능선에서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만일 이때 국군 2사단이 저격능선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금화와 철원지역은 대한민국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중동부 전선의 주요고지들

저격능선 승리 후 국군 2사단은 국군 9사단에 임무를 인계하고 철원 사창리로 이동하였고 1953년 1월경에는 평강평야가 훤히 보이는 들판에 진지를 구축하고 매복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무렵은 휴전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 속에 소규모 국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휴전이 되기 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마지막 혈투가 곳곳에 벌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지쟁탈전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그러던 중 휴전을 얼마 앞둔 7월 초순에 아군의 전초기지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1개 소대가 전멸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다른 때보다 경계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부대 임무 교대시기를 틈타 기습적인 공격이 가해졌던 탓이었다.

이에 화가 난 32연대장은 즉각 보복 공격을 지시했고 소대장이 없던 상태였던 3소대는 분대장인 박덕근을 선두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목숨을 건 돌격전 끝에 3소대는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빼앗긴 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고지를 빼앗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고지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후 중공군은 밤을 이용해 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아군은 몇 십 배나 되는 중공군의 대병력을 맞아 결사적으로 고지를 지켜내야 했다. 총신이 뜨거울 정도로 사격을 가해도 적들을 계속 몰려 왔고 가까이 접근한 적들은 아군 진지로 수류탄을 투척했다. 박덕근은 오로지 본능적으로 사격을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수류탄을 적을 향해 던졌다. 정녕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긴 밤이 지나고 먼동이 터올 무렵에야 아군의 지원부대가 도착했고 적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남기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고지에 도착한 아군의 지원부대는 고지 주변에 산처럼 쌓인 적들의 시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박덕근도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소대원들이 거의 전사하였기 때문이었다. 전날까지 함께 울고 웃던 전우들의 주검을 목격하는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야만 했다. 전우를 잃은 커다란 슬픔과 함께 부상의 고통 또한 그를 엄습해왔다. 전투의 혼란 속에서 느낄 틈이 없었지만 그 역시 팔목 관통상과 수류탄 파편에 머리를 다쳤던 것이었다. 부상이 깊어 서울로 후송된 그는 부산 제3육군병원에 이송되어 치료를 받다가 휴전된 지 몇 달 뒤인 11월에 부상으로 인해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대전차공격대대 2중대 화기소대장으로 활동한 조용갑 씨 이야기

조용갑은 사단 직할 부대였던 대전차공격대대의 2중대 화기소대장의 직책을 부여받았다. 당시 2중대에게 부여된 임무는 대관령 인근의 발왕산 정상 부근에 있는 적 사단 사령부의 위치를 알아내는 수색임무와 패잔병들을 소탕하여 적을 완전히 몰아내는 작전이었다. 조용갑이 지휘하는 화기소대는 수색작전을 펼쳤고 주력부대가 북으로 후퇴한 후 낙오해 버린 인민군들을 생포하였다. 그리고 바로 적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유천리로 이동하여 포위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후 조용갑은 대대 인사장교로 자리를 옮겼고 그의 부대는 강원도 인제군 현리에 주둔하고 있던 사단 사령부의 경계임무를 맡게 되었다. 일선 전투지역에서 약간 벗어난 사단 사령부에 배치된 조용갑은 생명의 위협은 없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일선 소대에 배치되어 있는 소대장들이 대부분 그의 동기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4월에 들어서 시작된 중공군의 1차 춘계공세 때 국군 3사단과 9사단은 크게 고전을 하게 되었다. 5월에 들어 시작된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 또한 중부 전선과 중동부 전선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3군단 전선이 뚫리면서 3사단과 9사단이 특히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현리의 고배’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에 의해 아군의 유일한 퇴로이자 보급로인 현리가 집중공격 당하자 어쩔 수 없이 막대한 장비를 버리고 허겁지겁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전투였다. 이 때 조용갑이 속한 대전차대대도 군사장비를 버리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을 굶으면서 탈진하여 쓰러져가는 대원들을 일으켜가며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다해 급속행군을 계속한 그는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평창에 집결하여 부대 재편성 후 18연대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부대는 ‘백골부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부대로서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전투에 투입된 장병들이 죽어서 백골이 되더라도 조국을 수호하자라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자신들의 철모에 백골을 그려 넣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백골부대는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단행된 총반격작전에서 1950년 10월 1일 38선을 최선봉으로 돌파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10월 1일 국군의 날은 바로 이 날을 기념해 제정된 것이다. 백골부대 수색중대의 선임 소대장으로 부임한 조용갑은 부임 즉시 쉴 틈도 없이 정찰임무를 부여받고 내설악과 오색 약수터 등 설악산의 험준한 계곡을 따라 적군들을 찾아내는 수색작전을 수행하였다. 이후 조용갑이 속한 수색부대는 간성 북방으로 진출하기도 하면서 끝까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8연대 1대대 2중대 소대장으로 활동한 김성욱 씨 이야기

김성욱은 국군 3사단 18연대 1대대 2중대의 소대장직을 부여받았다. 그가 배속될 당시 18연대는 오대산 월정사 부근에 있었다.

“중대에 도착해 보니 캄캄한 밤이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새벽 5시에 오대산 노인봉을 탈환하는 전투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소대원들 얼굴 익힐 틈도 없이 전투에 바로 투입되었습니다. 소대 선임하사로부터 인원현황만 간단히 보고받고 땅바닥에 누웠는데 긴장감으로 잠이 올 리 만무했죠. 그날따라 밤하늘의 별은 유난히 초롱초롱 빛나더군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날 밤의 긴장감은 김성욱의 기억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소대에는 전투경험이 많은 고참 하사관들이 많아 그는 솔직히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선임하사가 들려주는 전투경험담을 마음 속 깊이 새겼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시작된 전투에서 그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물리치고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첫 임무의 성공으로 기뻐하고 있던 그는 고지를 둘러보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얼굴이 어려보이는 적의 기관총 사수가 말뚝에 묶인 채 실신해 있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적의 지휘관이 기관총 사수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미리 묶어두었던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김성욱과 소대원들은 그 악랄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3사단을 비롯해 국군 3군단이 배치되어 있던 중동부 전선

이후 그의 부대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북진을 계속했다. 전투경험이 부족하여 아직 많은 것이 서투른 신임 소위 김성욱에게는 전투 지휘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가 시작되자 수적인 열세를 견디지 못한 사단 사령부에서는 예하 부대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의 기습은 계속되었고 김성욱은 철수하는 부대를 엄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는 적의 추격으로부터 철수하는 부대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소규모의 전투를 하면서 적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임무이다.

임무를 완수한 김성욱의 소대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인민군으로 위장한 채 따돌려가며 힘겹게 복귀를 할 수 있었다. 며칠째 굶은 상태로 야간행군을 계속한 탓에 수통의 물도 제대로 받아 마시지 못할 정도로 탈진한 소대원들을 독려하면서 가파른 산비탈을 구르다시피 하여 겨우 오대산 월정사에 도착한 그의 부대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최종집결지인 유천리로 야간행군을 계속했다. 유천리에 도착한 김성욱은 다시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는 작전과 중공군을 수색하는 작전 등을 명령받고 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적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는 도중 김성욱은 왼쪽 발에 부상을 입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상처가 자꾸 악화되면서 당시 강원도 묵호에 있던 육군 59이동외과병원까지 후송되어 명예제대하게 되었다.

대전차공격대대 1중대 소대장으로 활동한 이활남 씨 이야기

3사단에 배속된 이활남은 조용갑과 같은 대전차공격대대 1중대 소대장으로 배속 받았다. 처음 이활남이 배속되었을 때 그는 신임 장교들을 대표해서 인사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인사말을 하자마자 중대원들 사이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웅성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서투른 한국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대장이 그를 일본에서 징집영장도 받지 않고 자원한 재일학도의용군이라고 소개하자 중대원들은 웃음을 거두고 그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모두들 꺼려하는 전쟁터에 스스로 찾아온 사람에 대한 경의와 존경의 표시였다.

이후 발왕산으로 출동한 부대는 곧장 참호를 파고 매복작전에 들어갔으며 며칠 후 대대병력으로 추산되는 적들이 북상하는 것을 발견하고 연대본부에 통보하여 적들을 전멸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발왕산 작전 이후 중대는 상급부대의 명령대로 크고 작은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1년 5월경 현리로 이동했다. 이 무렵 중공군은 4월 초 시작된 1차 춘계공격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2차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공세를 맞아 국군의 방어선은 곳곳이 뚫리고 말았다.

이활남은 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중대병력을 섬멸하라는 작전을 하달 받고 중공군 병력이 지나갈 지점에 미리 매복을 하고 적을 기습하는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 이활남은 심한 대장염을 앓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중이었다. 탈수현상으로 혼수상태 직전인 몸을 이끌고 중공군의 추격을 피해 공격과 후퇴를 하자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연락병이 건네 준 건빵 몇 개로 배고픔을 달래가며 후퇴를 계속 하던 끝에 구사일생으로 집결지에 도착한 그는 강릉으로 이동하여 부대 재편성에 들어갔다.

그 후 22연대 1대대 1중대 3소대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활남은 주문진을 거쳐 북진을 계속하여 간성까지 진출했다. 금강산이 바라보이는 해금강까지 진출한 이활남의 중대는 적이 토치카를 구축하고 있는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고지전투가 처음이었던 이활남은 흥분과 두려움이 동시에 교차했다.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소대가 1차 목표를 점령하고 2차 목표를 공격하자 적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높은 고지를 차지한 적들이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탄환 때문에 소대는 전진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이활남은 총유탄으로 적의 토치카를 박살내는 것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명령을 내렸다. 아군이 발사한 총유탄이 적의 토치카에 명중하자 적의 사격이 멈추었고 소대원들은 그 때를 틈타 돌격을 개시하여 끝내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전투를 수행하던 부대는 11사단과 교체하여 향로봉 인근의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30명도 채 되지 않는 소대병력으로 500m의 방어지역을 책임진다는 것을 무리한 일이었지만 그의 소대는 최선을 다해 맡은 지역을 방어했다. 그러는 동안 수류탄의 불발로 부하를 잃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적 진지에 명중한 수류탄이 불발하는 바람에 오히려 적이 던진 수류탄에 1분대장이 부상을 입고 아까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활남은 너무나 분통하여 후에 예비대로 후방으로 이동했을 때 남은 수류탄을 투척해 보았다고 한다. 43발 중 제대로 폭발한 것은 겨우 6발뿐이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국군들은 목숨을 바쳐 싸웠던 것이다.

이후 이활남의 부대는 강원도 양양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을 계속하다 중동부 전선의 산악지대로 투입되었다. 부대가 도착한 곳은 일명 ‘피의 능선’이라 불리는 김일성 고지 인근이었다. 적과 아군이 쉴 새 없이 쏘아대는 포소리가 계속되었다. 당시 김일성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아군과 적 사이에서 매일처럼 뺏고 뺏기는 쟁탈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에게도 김일성 고지를 재탈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활남은 소대원들을 이끌고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도중 복부에 총상을 입었으나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22연대 3대대 10중대 3소대장으로 활약한 윤용근 씨 이야기

윤용근은 22연대 3대대 10중대 3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3사단은 가리봉에서 원통리까지 이어진 서쪽 능선에 방어선을 치고 있었고, 윤용근이 속한 3대대는 좌전방 대대로 1226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투입된 전투에서 소대 단위로서는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엄청난 전과를 거두었다. 적 10사단 작전참모와 정보참모 등 인민군 고위급 장교를 포함해 모두 12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그 덕에 군단장으로부터 직접 격려를 받기까지 했다. 이 때 생포한 인민군 포로들로부터 고급 정보를 입수한 아군은 이후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 한편 그의 부대가 가리봉에 주둔하고 있을 무렵 공산군의 대대적인 춘계공세로 사단 전체가 철수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철수하는 부대를 엄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그의 부대는 엄호작전을 수행하고 맨 나중에 후퇴를 해야 했다.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도중에 겪은 고생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옥과도 같은 그곳에서 살아서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만 해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후퇴 도중 많은 병사들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낙오하거나 아니면 적의 포위망에 걸려 포로로 잡히거나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철수하여 재편성된 그의 부대가 다시 투입된 곳은 바로 김일성·모택동 고지였다. 공산군은 924고지와 1026고지에 철통같은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이곳을 기필코 사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북한과 중공의 수령인 김일성과 모택동의 이름을 각각 붙인 것이다. 이 두 고지를 점령하면 만대리 분지를 차지하는 데 매우 유리했다. 따라서 이 두 고지의 쟁탈전은 중동부 전선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1년 10월, 22연대는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던 이 두 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아군의 공격에 가장 큰 장애물은 견고하게 구축된 요새에서 내뿜는 기관포였다. 또한 적들은 아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요새 주변에 지뢰까지 매설해 두어 점령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아군은 엄청난 출혈을 요구하는 백병전으로 적의 벙커를 하나씩 점령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10월 하순에 이르러서야 고지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특히 모택동 고지를 점령했을 때는 1개 중대 병력의 생존자가 40여명 밖에 남지 않을 정도였고 하루에 아군 희생자 만 300여명이 넘을 정도였다.

공격도 힘들었지만 고지를 빼앗긴 공산군이 반격에 나섰으므로 바로 방어작전에 들어가야 했다. 얼마나 수류탄을 많이 집어던졌는지 1인당 지급받은 40~50발의 수류탄이 바닥날 정도였다고 한다.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아군의 방어에 결국 적은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중대원들은 겨우 20여명 밖에 안 되었지만 고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하지만 항상 고지를 사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순간 고지를 점령했다가도 야간에 다시 공산군에게 고지를 뺏기기도 하고 다시 새벽에 탈환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다.

이후 윤용근은 1052고지 전투에서 활약한 공적을 인정받아 금성화랑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훈장이 자신에게 수여된 것이 아니라 고지 쟁탈전에서 꽃다운 젊음을 바친 병사 모두의 것이라고 믿었다.

김일성고지, 피의능선 등이 자리하고 있는 펀치볼지구

7연대 소총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윤호태 씨 이야기

호태는 육군종합학교를 마치고 국군 6사단 7연대의 소총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있기 전 국군 6사단은 강원도 사창리 일대에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6사단은 신병 보충과 충분한 보급품의 지급으로 그 어느 때보다 사기가 충천해 있는 상태였다. 6사단은 크리스마스 공세 때 적에게 당한 것을 설욕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1개 사단 병력으로 사단 전면에 배치된 60,000명이 넘는 중공군을 상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전투경험이 풍부한 팔로군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중공군은 야간전투에 능하였다. 중공군은 아군의 방어선 중 돌파하기 어려운 곳은 피하고 대신 우회하여 취약한 부분을 택해 집중공격하는 전술을 택하고 있었다.

한편 7연대는 4월 23일 신속하게 이동하여 38선 부근 진지를 점령하고 사단 주력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라는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이동했다. 하지만 이미 19연대의 방어선이 뚫리고 2연대의 후방까지 중공군이 침범하여, 주력부대가 적의 포위망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7연대는 주력부대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옥녀봉의 후방으로 이동한 다음 방어태세에 돌입했으나 이미 한번 무너진 전세를 되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아군의 결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결국 4월 25일 사단 사령부가 주둔해 있던 사창리는 중공군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고, 6사단은 사단 병력의 절반에 해당되는 6,0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보았다. 후퇴를 하던 당시 상황이 너무나 위급하여 다들 뛰다 시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쓰러지거나 지쳐서 대열에서 낙오하면 다시 소속부대를 찾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윤호태도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정신력 하나로 버텨 겨우 철수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제51독립연대 1대대 1중대 소대장으로 자리를 옮겨 9사단에 배속되어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9사단과 중공군이 12회에 걸쳐 공방전을 벌인 끝에 결국 국군이 최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한국전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철원평야를 지킬 수 있는 요충지인 백마고지는 아군과 적이 얼마나 심하게 포격을 감행했던지 고지의 표고가 1m 이상 낮아지기도 하였다. 포탄에 의해 파헤쳐진 고지의 생김새가 말의 등처럼 하얗다고 해서 백마고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10일 동안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의 전사자는 무려 13,000여 명을 넘었고, 9사단은 중공군 정예 2개 사단과 정면으로 붙어 승리하는 기쁨을 누렸다.

21연대 수색중대에서 활약한 이종범 씨 이야기

국군 8사단 21연대 수색중대에는 이종범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는 재일학도의용군만의 부대였던 3·1독립보병대대 해산 이후 국군에 편입하여 부산의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후 당시 제주도에 있던 제2훈련소 교도연대 화기학과 중화기반 조교로서 신병들의 교육훈련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방에서 전투요원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방근무 자원을 신청했다. 당시 많은 군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최전방보다는 생명의 위협이 덜한 후방으로 전출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남들 같으면 최고의 보직이라고 생각하는 훈련소 근무를 사양하고 자원하여 전방으로 가려는 그를 주위에서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조국을 지키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던 그는 결국 국군 8사단에 배속되어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종범은 1953년 7월 13일 소위 7·13 대공세라고 하는 중공군의 대공세를 맞게 된다. 휴전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공세를 시작한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해 국군 6사단과 8사단의 후방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이후 국군의 반격이 이어져 국군 2군단은 중공군의 공세로 잃었던 지역의 절반 정도를 탈환하지만, 결국 이 전투로 국군 전사자 1,700여명이 발생했고 중공군도 25,000여 명이 사망하는 등 양쪽이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이종범은 적에게 포위되었고 3일에 걸쳐 적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때 그만 끈질기게 추격하는 적과 싸우다 오른쪽 어깨에 파편상을 입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부상이 심하여 울산 제23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오랜 입원 생활을 거친 끝에 1953년 11월경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최성규 씨 이야기

최성규는 미군에 있다가 국군 9사단으로 편입되어 전쟁을 치렀다. 특히 그는 인민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오는 혹독한 경험을 치렀다. 전투에 참가했다가 인민군에게 생포되는 신세가 된 최성규는 인민군 부대에 억류되어 있었다. 당시 인민군도 전황이 다급한 상황이라 그를 포로수용소로 후송시킬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적의 지휘관이 그를 즉결처형하지 않고 살려둔 것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의 대대적인 화력에 큰 인명손실을 입었던 인민군은 심각한 전투병력 손실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병력보충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인민군들은 포로로 잡힌 국군 병사들을 사상개조를 통하여 강제로 인민군에 편입시킨 후 최전선으로 보내 자신들의 총알받이로 사용하였다. 포로수용소로 후송하지도 못하는 최성규를 살려둔 것은 그런 목적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부터 북한 공산당의 실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최성규가 그런 속임수에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그는 거짓으로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척하면서 탈출의 기회를 엿보다가 전투가 벌어진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게다가 최성규는 인민군 부대에 있을 때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던 인민군 병사를 설득하여 그를 귀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인민군 병사 한 명을 사살하는 것보다 더 갚진 성과였다.

그는 이후 백마고지 전투 때에도 공병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아군의 전투역량 강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공병대대 작전과 전우들과 함께. 앞줄 맨 왼쪽이 최성규이다.

30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장으로 활약한 유승호 씨 이야기

유승호는 9사단 30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장으로 배속받았다. 당시 30연대 본부는 강릉에서 약 8km 떨어진 구산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1951년 5월에 접어들면서 공산군은 4월 춘계공세 때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과 물자의 보충을 끝내고 공격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사단 사령부에서는 적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30연대로 하여금 인민군 32사단 2연대가 점령하고 있는 매봉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승호에게는 소대장으로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참가하는 연대 규모의 작전이라 사뭇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매봉산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험준한 돌산이었다. 그러나 아군이 북진하기 위한 기동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령해야만 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연대장은 왼쪽에 3대대, 오른쪽에 2대대를 배치하고 1대대를 예비대로 대기시킨 후 5월 7일 새벽 항공과 포병대의 지원을 받아가며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적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완강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오후 5시 무렵이 되어서야 고지 점령을 위한 전진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대대는 3대대와 임무교대를 하고 공격선상에 배치되었다.

유승호가 지휘하는 3소대는 공격의 선두에 나서 고지를 향해 돌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평상시에도 그냥 올라가기 힘든 가파른 암벽을 적의 집중사격을 피해 가며 돌격한다는 것을 정말 악전고투였다. 가까이 접근하면 적은 수류탄을 던졌다. 적의 저항에 부딪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유승호는 어차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죽을 바에야 돌격을 하다가 죽기로 마음먹었다.

소대장이 앞장서서 돌격하자 소대원들도 용기를 내어 소대장의 뒤를 따랐다. 아군도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돌격이 용이하도록 엄호사격을 해주었다. 수류탄을 던지며 전 진지로 돌격해간 아군은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을 물리치고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무려 3일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된 근접전 끝에 이룩한 값진 성과였다.

이후 유승호는 2사단과 교대되어 배치된 저격능선과 철원 사창리에서도 공을 세워 사단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는 등 소대장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냈다. 백마고지 전투에도 참여한 그는 대관령, 인제, 금화, 철원을 누비며 598고지 전투, 금화전투 등에서 훈장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군복무를 계속하다가 1959년이 되어서야 제대를 하였다.

저격능선 전투 공로로 9사단장 표창장을 받고 있는 유승호

공병대로 활약한 재일학도의용군

9사단 공병대에는 일본에서 부산으로 건너와 바로 국군에 입대한 김영은, 명덕일, 박덕철, 신효갑, 이완공, 이창진, 장덕준, 최성규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미군부대를 거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바로 부산 범일동에 있던 육군 제2훈련소를 거쳐 대전에서 창설된 9사단의 공병대대에 배속되었다.

공병은 도로 개설과 교량 가설을 비롯하여 철조망 가설, 지뢰 매설, 폭파작업 등이 주임무이며, 위급 시에는 직접 전투에도 투입되었다. 대부분 시간에 쫓겨 무방비 상태로 작업에 임하면서 적탄에 맞아 부상당하거나 전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덕준은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하여 30연대 전방의 주저항선에 철조망가설 작업을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다가 적탄에 우측 대퇴부 관통상을 입고 당시 경주에 있던 18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러나 부상이 완쾌되자 바로 원대 복귀하여 저격능선 전투, 금화지구 전투에 참가하면서 휴전이 될 때까지 활약하였다.

박덕철, 명덕일, 신효갑, 이완공은 28연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남으로 진출했던 인민군 10사단 병력이 아군의 방어선을 뚫고 북으로 철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저지하라는 상급부대의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미리 예상 철수로에 장애물을 설치해 놓고 매복하고 있었다. 얼마 뒤 공산군은 아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전에서 공병대대는 교묘하게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들을 섬멸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아군은 1,000여명이 넘는 포로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인민군 10사단은 재기할 능력을 잃고 인민군 편제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육군 제1103야전공병단에 배속되어 있던 구일영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한 이후 11월 서울에서 창설된 1103야전공병단은 중동부 전선의 춘천, 원주, 홍천, 오대산 등지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보급로 확장과 교량가설 등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항상 좋은 결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위험한 임무임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던 명덕일, 이완공은 인제지구 전투에서 아깝게 전사하고 말았다. 특히 더 안타까운 일은 아군이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이완공의 경우 시신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춘생이 배속되어 있던 28연대 3대대 또한 충남 금산의 한 초등학교에 주둔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인민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전북지역 공비토벌작전에서는 히로시마에서 자원하여 출정했던 박완열이 실종되는 일도 벌어졌다.

9연대 화기중대 소대장으로 활약한 조만철 씨 이야기

육군종합학교를 마친 조만철은 국군 11사단 제9연대의 화기중대인 8중대의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한지 두 달 뒤인 1950년 8월 27일 경북 영천에서 창설된 11사단은 당시 지리산의 인민군 패잔병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조만철은 부임하는 즉시 밤낮과 전선이 따로 없는 공비토벌작전에 6개월 동안 투입되었다.

지리산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이었지만 산세가 험준하고 매우 깊은 산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 정규부대가 지리산으로 입산하였기 때문에 공비들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으로 나선 공비들을 토벌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고, 따라서 지리산에는 전선 아닌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후 8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여 전방으로 이동한 조만철의 부대는 동부 전선에 투입되어 강원도 속초의 884고지 탈환전투에 참가한다. 884고지에는 인민군 1군단 예하의 3사단과 47사단의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시기 전투의 양상은 고지를 사이에 두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점령하려는 진지전 양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따라서 아군과 적군 사이에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전투 대신 서로를 소모시키려는 소규모 병력을 동원한 교전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사단은 6월 하순 아군 항공기의 지원을 받아가며 적 진지의 일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이자 험악한 지형을 가진 884고지를 사수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게다가 여름철 강한 폭우로 인해 11사단은 884고지를 빼앗았다 다시 빼앗기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결국 11사단은 치열한 혈투 끝에 미군의 155mm 곡사포 1개 중대를 지원받고 나서야 8월 27일 고지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조만철은 국군에서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열심히 군복무를 하였다. 이후 그는 18년 동안 대한민국 육군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마치고 소령으로 제대하였다.

의무대로 활동한 강대윤 씨 이야기

강대윤은 미 3사단 의무대대 의무중대에서 활동하였다. 직접 전투부대에 소속되어 총을 들고 적과 싸우고 싶었지만 일본 병원에서 근무한 경력을 고려한 미군 측에서 위생병으로 배속시켰던 것이다. 그는 보병으로 참전하게 해달라고 사정하였지만 보병 못지않게 위생병의 임무도 중요하다는 미군 측에 의해 거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위생병 교육을 끝낸 그는 이동하는 부대를 따라 고쿠라항에서 승선했다.

느낌으로 한국으로 이동한다는 것이 분명했지만 목적지는 알 수 없었다. 1950년 11월 자정 무렵 배는 이름 모를 항구에 도착했고 누군가 ‘원산’이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 그는 자신이 원산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인민군은 유엔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를 계속하고 있었고, 따라서 전투 지역 또한 수시로 바뀌었다. 의무대 역시 전투지역 가까이에서 부상자들을 응급치료 해야 했으므로 항상 전투부대와 함께 이동해야 했다.

일선 전투지역을 따라 원산과 영흥 부근에서 주둔하고 있던 그의 부대는 상륙 후 한 달 쯤 뒤에 장진호 부근으로 이동한다. 당시 장진호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엔군은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참전과 영하 20도가 넘는 강추위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린 유엔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의무대 또한 철수하는 부대를 따라 함흥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며칠 버티지 못하고 다시 흥남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미 10군단의 북진 경로 (실선은 미 10군단 진로이고 점선은 국군 1군단 진로이다.)

흥남에 도착한 의무대는 비료공장의 부속병원 건물이 위치한 곳에 의무실을 설치하고 전방에서 후송되어 오는 부상자들을 치료하였다. 전방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탓에 워낙 부상자가 많아 의무대의 취사병까지 부상병 치료에 동원될 정도였다. 잠 잘 틈도 없이 매일같이 부상병의 응급치료에 매달리면서 그렇게 2주일을 보냈을 무렵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이른바 흥남철수작전이었다.

흥남부두 해변 모래사장에는 미처 옮기지 못한 군수물자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뻘건 불꽃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고, 남쪽으로 피란을 가려는 수많은 피란민들이 배를 타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배를 타지 못한 피란민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흥남부두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고, 이를 지켜봐야 하는 대원들은 안타까워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 앞에 정박한 수송선에 승선한 의무대는 이틀 뒤 25일 새벽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강대윤은 경북 경주에서 재편성한 부대를 따라 다시 전방으로 이동하여 서부 전선의 백마고지와 오성산 전투에 투입되었다. 미군에서 4년간을 복무한 강대윤은 휴전과 함께 다시 한국군에 편입하여 2년을 더 복무하였다. 비록 총을 잡고 전투를 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생명을 구한 그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미 3사단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장진호 부근의 야전병원 앞에서.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강대윤이다.

통역병이지만 전투에 참전했던 신효근 씨 이야기

미 3사단 15연대 2대대에서는 신효근이 대대본부 통역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원산에 상륙한 부대를 따라 후퇴하는 적을 격퇴하며 북진을 계속하다가 뜻밖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이동을 한다. 부산에 도착한 그의 부대는 경주에 잠시 주둔하다가 1951년 1월 2일경 이동명령을 받고 전방으로 이동 중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일대에서 중공군과 약 20일간 대치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용인 인근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중공군과 대접전이 붙게 되었다. 인해전술을 내세우며 돌격전을 감행하는 중공군들에게 아군이 화력을 집중적으로 퍼부어대자 결국 중공군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막대한 손해를 입은 채 공세를 멈추었다. 이후에도 그의 부대는 1951년 3월 서울에 입성한 후 개성을 목표로 전진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의정부에서 적에게 포위된 영국군 구출 임무를 부여받고 적과 아군도 구분할 수 없는 야간에 백병전을 치러야만 하는 처절한 사투를 치르기도 했다.

그 후 그가 속한 대대는 백마고지 전투의 주력부대로 선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신효근은 일선에서 전투 지휘를 하는 대대장 일행과 동행하여 최전선으로 가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대대장은 그의 직책이 대대참모들의 통역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것보다 통역 임무에 전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효근은 재일학도의용군으로서 자원 참전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전투에 참가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사지로 스스로를 보내달라고 하는 신효근의 용기를 높이 산 대대장은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백마고지를 공격하는 데 주력부대로 나선 그의 대대는 끈질기게 저항하는 적을 제압하고 백마고지를 탈환하는 데 결국 성공하였으며 고지의 방어임무는 국군 9사단에게 인계하고 경기도 연천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편 1952년 2월부터 유엔군과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제 전쟁은 서로에게 엄청난 손실만 가져다 줄 뿐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휴전회담이 전개되고 있는 중에도 전투지역에서는 계속해서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아까운 젊은 목숨들이 계속해서 쓰러져 갔다. 그러나 휴전회담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 공산군은 생포된 재일학도의용군을 빌미로 미군이 일본군을 참전시켰다고 강력하게 항의해 왔다. 재일학도의용군이 한국말이 서투른 대신 일본어가 능숙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일본군의 한국전 참전 여부가 계속해서 논란이 되자 한 때 유엔군은 문제의 소지를 제공한 재일학도의용군을 모두 일본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이는 즉시 미군의 각 부대로 하달되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군의 정체가 조선인 부대라고 보도한 CBS 동경지국장의 보도를 소개하고 있는 일본신문 1952년 9월 30일자

미 3사단에서도 이와 같은 명령을 받고 재일학도의용군을 소집했다. 처음 52명으로 배속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그 당시 18명으로 줄어있었다. 남아있는 이들은 동지들의 고귀한 희생을 모른 척하고 살아 돌아갈 수 없다면서 미군의 송환 명령에 강력 항의했다. 또한 그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적에게 빌미를 잡혀 나쁜 선례로 남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미군을 설득했다. 결국 미군 측은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원대 복귀를 시켰다. 복귀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미 3사단과 함께 행동을 같이 하며 계속 전투에 참가했고 이후 전투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신효근과 김창수 등은 1954년 2월 재일학도의용군 참전 1,000일을 기념하는 미국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오이타에서 참전한 재일동포 2세 김재생 씨 이야기

미 3사단에 배속되어 전쟁에 참가했던 김재생은 일제 강점기 시절 오이타에서 태어나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 재일동포 2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전에 자원하는 것이 한민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50년 11월 원산상륙작전에 투입되는 것을 시작으로 조국 땅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된다.

이 무렵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를 찔린 인민군은 개전 초기의 기세등등하던 모습과는 달리 별다른 저항도 못한 채 북으로 후퇴를 계속하고 있었다. 원산에 도착한 그의 부대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약한 적의 저항을 물리치며 북진을 계속했다. 사실 김재생에게 적의 저항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겨울에 접어들어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혹한의 날씨였다고 한다. 일본의 따뜻한 남쪽 지방인 오이타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에게는 난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무서운 추위였다. 겨울에도 눈을 좀처럼 보기 힘든 오이타와는 달리 북한 지방에는 엄청난 폭설과 함께 추위가 휘몰아쳤다. 게다가 그의 부대가 장진호 인근에 다다랐을 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바로 대규모의 중공군 병력들이 나타난 것이다.

중공군은 순식간에 김재생이 배속된 미군 부대를 포위한 채 인해전술로 압박을 가해 왔다. 역습당한 아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전사자가 속출했으며 김재생과 함께 온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도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미군 대대병력이 전멸하다시피 하는 치열한 격전을 치른 끝에야 아군은 간신히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할 수 있었다. 김재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함흥으로 철수하는 대열에 낄 수 있었지만, 많은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이 불행하게도 살아서 원대 복귀를 하지 못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경로

통일을 눈앞에 두고 철수해야 했던 박진우 씨 이야기

박진우를 포함한 미 7사단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1950년 10월 말 부산에서 미군 수송선에 승선했다. 무려 50시간이 걸린 지루한 항해 끝에 부대가 상륙한 곳은 함경남도 이원이었다. 이원에 상륙한 부대는 적의 뒤를 쫓아 풍산으로 진격했고 박진우가 배속된 중대는 큰 도로를 피해 험준한 산맥을 타고 이동하면서 주민들에 대한 검색과 패잔병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11월 초 이미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 야전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장병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미 7사단은 북진을 계속했다. 이제 조금만 더 북진하면 공산군을 몰아내고 완전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에 벅차 모든 것을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통일은 쉽지 않았다. 압록강을 건너 온 중공군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박진우가 속한 중대도 풍산 인근의 웅이천을 도하하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선발대로 강을 도하하던 1소대가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의 집중공격을 받은 것이다. 강을 건너던 중 집중사격을 받은 소대원들은 부상을 입고 하류로 떠내려갔다. 이 때 박진우는 함께 행동하던 카투사 병사와 함께 도하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박진우는 갑자기 총성이 들리자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전우의 허리를 잡으며 바닥에 몸을 던졌지만, 그는 이미 적탄을 맞고 숨을 거둔 다음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전우가 싸늘한 시체로 누워있는 것을 보고 그는 애통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후 그의 부대는 힘겹게 전진을 계속하여 갑산군 산남면까지 진출하였고,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11월 21일 아침에는 혜산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혜산진은 압록강을 끼고 중국과 접한 지역으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자락을 바라볼 수 있었다.

“웅장하고 장엄한 백두산이 지척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경건한 마음조차 느꼈다. 도쿄에 살 때 후지산을 보았지만 그 산은 연약한 여성적인 산이었는데 백두산은 정말 웅장하고 남성적인 산이었다. 백두산의 영기를 타고난 한민족은 역시 예사로운 민족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드디어 조국의 통일을 눈앞에 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박진우의 보훈신문 기고글 중에서

그러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장면도 있었다. 혜산진으로 통하는 들판에는 민간인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반동분자라는 명목으로 이들을 학살한 것이다. 이처럼 전쟁은 군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뒤따르는 참담한 것이었다. 부대원들은 희생당한 이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기 위해 시체를 땅에 묻고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주었다.

한동안 혜산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는 삼수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 하지만 삼수를 목전에 앞둔 지점에서 중공군의 대반격을 받게 된다. 그때부터 중공군의 대대적인 참전이 시작되면서 상급 부대로부터 후퇴명령이 하달되었다. 조금만 더 거세게 치면 통일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물러서야 하는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또한 아군의 많은 부대들은 살인적인 추위와 중공군의 포위공격으로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7사단에 배속되었던 재일학도의용군 중 83명의 희생자가 나온 것도 바로 이 철수작전에서였다.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부산으로 후퇴한 그의 부대는 다시 열차편으로 전방으로 이동한다. 이후 그는 오대산 전투와 금화지구 전투 등 일선을 떠나지 않고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러다가 강원도 인제지구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부상에서 완치되어 퇴원을 하자 그에게 국군으로의 전속명령이 떨어졌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박진우는 그렇게 국군에 편입되었고, 그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군번을 받을 수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자신의 군번을 되새겨 보는 그의 마음은 참으로 뿌듯했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대한민국의 군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31연대에서 활약했던 우지식 씨 이야기

미 7사단 31연대에는 우지식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가 소속된 31연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원에서 주둔하다가 부대 이동명령을 받고 부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다시 이원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이후 백산 일대에서 1개 대대 규모의 적과 교전한 결과 약 5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 때 적군을 확인해 본 결과 인민군이 아닌 중공군임을 알게 되었다. 한편 아군은 장진호와 부전호 부근에서도 중공군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수세에 몰린 북한군이 중공군의 참전을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아군은 북진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우지식이 속한 3대대는 갑산을 거쳐 삼수를 향해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대대 척후병으로 선발되어 대대의 안전한 진격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수로 향하는 길목인 황초령 고개에서 척후 임무를 수행하던 중 중공군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다. 미리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힌 척후병들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그 많은 수를 감당하지 못해 하나 둘씩 쓰러져 갔다. 결사적인 교전 끝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던 척후병들은 우지식과 미군 병사 1명뿐이었다. 부대로 원대 복귀한 우지식은 적지에다 전우를 내버려 두고 자신만 살아났다는 자괴감에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위험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중공군 2차 공세 때의 전황

얼마 후 그는 야간에 수색임무를 부여받고 미군 병사 1명과 임무를 수행하다가 아군부대의 초소를 식별하지 못해 자칫하면 아군의 손에 죽을 뻔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고, 복귀하던 중 밤새 내린 눈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바람에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워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또 한 번은 발을 헛디뎌 함정에 빠지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다행히 동료가 있어 서로 허리에 차고 있던 탄띠를 연결하여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편 부전발전소를 점령한 연대는 장진호를 목표로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이 확인되자 후퇴명령을 받고 흥남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진호 동쪽에서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31연대장을 비롯하여 약 500여 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연대장이 전사하자 연대지휘권을 인수한 제1대대장은 부대가 전멸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으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결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이 탈출작전에서 우지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31연대는 단 하루 동안 2,500여명 연대병력의 75%를 상실하는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군번조차 받지 못한 채 전사한 83명의 동지들

미 7사단에는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이 다른 단위부대보다 훨씬 많은 120여 명 가량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과 동해안의 이원상륙작전,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진 혜산진과 장진호 전투를 치르면서 이들 재일학도의용군 중 무려 83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흥남까지 이어진 철수작전 도중 막대한 피해를 입은 7사단에서 재일학도의용군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재일학도의용군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이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줄곧 미군에 배속되어 미군 병사들과 전투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번조차 부여받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군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정확한 실종 또는 전사지역이 확인되기 힘들었다. 그 때 실종 처리된 재일학도의용군들 중에는 후에 남으로 귀환하거나 휴전 후 포로교환 때 돌아온 사람들이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전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휴전 후 오랫동안 실종자로 처리되어 있던 이들은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반세기가 가까워오는 1992년 11월 19일에 이르러서야 육군 본부에 의해 전사자로 확정 처리되었다. 그리고 1993년 3월 24일에 이들 83위의 전사자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봉안할 수있었다.

이처럼 군번도 없이 낯선 조국 땅에서 젊은 목숨을 바친 83명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그 누구보다도 용감한 군인이었다. 살아남은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은 비록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이지만 동지들의 넋을 모실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하며 먼저 간 동료를 추모했다.

철수 도중 희생된 7사단 83명의 소속부대와 명단은 다음과 같다.

<미 제7사단 17연대>
강위수, 강희수, 권창환, 감광래, 김선수, 김암이, 김영수, 김장옥, 김정두, 도기찬, 박용문, 백영근, 서기순, 손상달, 송영석, 손호준, 신현, 이말학, 이영근, 이양모, 이재천, 장달봉, 장중동, 정석수, 조병순, 조휘성, 최양진

<미 제7사단 31연대>
공형근, 김금태, 김봉상, 김영식, 김재봉, 김정현, 김태인, 김중, 박재호, 박정문, 박용태, 박태현, 손찬순, 성재숙, 송재옥,이기수, 이봉수, 이상근, 이이도, 이천희, 장옥기, 정수치, 정태진, 정해당, 진재식, 최병종, 한영교, 황순언, 황태용

<미 제7사단 32연대>
강재오, 김군복, 김덕수, 김부사, 김병기, 김순용, 김연홍, 박노식, 방영욱, 신성백, 신정희, 엄강영, 오동수, 유광식, 유삼웅, 유신오, 윤명근, 이선기, 이용홍, 조기옥, 조명석, 주수회, 최길웅, 최용덕, 한동춘, 한창운, 홍조학

조국의 창공에서 산화한 박두원 씨 이야기

재일학도의용군 중에는 일본군에서 항공병으로 복무했던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박두원, 박연규, 박청남, 이규달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박연규, 박청남, 이규달 등은 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졸업한 후 하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항공대에서 복무했던 경력을 살려 육군본부 작전국 항공과로 전출하여 육군항공대 창설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이규달은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중위로 임관하여 육군항공대에서 조종사를 양성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한편 박두원은 공군에 입대하여 공군 조종간부후보생 교육을 마친 뒤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어 활동했다.

7살의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간 박두원은 일본 육군 비행학교인 다치아라이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징집되어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일본에서 조종사로 일하면 누구보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다.

한국에 도착한 박두원은 처음에는 부산의 육군 헌병대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공군 전투기 조종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그의 과거 경력을 알고 있던 동료와 상관이 적극 추천하여 1952년 2월 공군에 입대하여 조종훈련을 받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우리 공군은 구식 경비행기와 겨우 수십 명에 불과한 조종사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종간부후보생 16기를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한 박두원은 3월초 강릉에 있는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을 받았다. 한국 공군의 독자적인 출격은 거의 제10전투비행전대가 있는 강릉비행장에서 이루어지다시피 했다. 전투기 조종사로 부임한 초기에는 한국말이 서투르고 일본말을 자주 사용하여 동료들의 눈총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가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경위가 알려지고 생사를 넘나드는 출격이 거듭되면서 동료들과의 서먹한 감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박두원은 우리 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F-51 무스탕 전폭기를 타고 첫 출격을 시작한 이후, 원산, 고성, 간성, 신안주 등의 적 진지 공격과 보급로 차단작전 및 지상군 근접지원 작전을 수행하였고, 5개월 동안의 기간 동안 89회라는 경이적인 출격기록을 세웠다. 특히 그는 1952년 6월 28일의 출격에서 공격목표지점을 완전히 파괴하는 보기 드문 전과를 올려 미 국방성으로부터 특별 수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1952년 8월 2일 박두원은 내금강 장안사 인근 적의 물자보급소를 목표로 출격하였다. 그러나 이날따라 기상상태가 나빠 낮은 고도로 비행을 하던 그의 전투기는 강릉을 지나 속초 상공에 이르렀을 무렵 집중적인 대공포 사격을 당하게 된다. 비상탈출을 시도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26세의 꽃다운 청춘을 창공에 꽃잎처럼 뿌려버리고 만 것이다.

전사 후 동료들에 의해 100회 출격기록을 세운 박두원 대위. 1990년 6월 26일자 조선일보.

“왜 일본에서 지원했냐고 물으니까 자기도 같은 한국사람인데 조국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말은 쉽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시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된 50명의 조종사 중에서 19명이 전사했습니다. 누구 하나 헛된 희생을 아니었습니다만, 박두원 대위의 죽음은 정말로 우리에게 큰 의미를 전해주었습니다. 조국애에 대한 참뜻이 사라져가는 요즘,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뜨거운 마음이 더욱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 박두원 대위의 동료였던 배상호 장군 인터뷰 중

그는 비록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렇게도 조국을 사랑하던 그 마음은 그가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이 땅과 이 하늘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전장 곳곳에서 조국을 지켰던 재일학도의용군들

단일부대를 이루지 못하고 군번도 받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싸우던 재일학도의용군들에 대해서 CBS 도쿄지국장 조지 하먼은 ‘유령’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 개의치 않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맡은 바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미 8군 예하 60부대에는 이종록을 비롯해 여러 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종록은 이후 미 3사단 수송대대에 전속되어 전투에 참가하였고 부대를 따라 이동하며 수송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흥남철수작전 이후에는 미 8군 포병대대로 전속하여 그곳에서 계속 복무하다가 1952년경 제대를 하였다.

미 8군 예하 336부대에는 유성철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북진하는 미군부대를 따라 평양까지 진출하여 군수 보급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10군단 사령부 G-4에는 정현이 배속되어 있었다. 정현은 원산과 함흥 등지로 이동한 부대와 함께 행동하며 군수 지원 업무를 계속 담당하다가 1953년 7월 휴전 후에 제대를 하였다.

이범재는 대대 정훈관으로 부임해 있다가 공비토벌이 한창이던 지리산으로 이동하여 공비들의 귀순작전을 수행하였고, 이후 파견대장으로 승진하여 임실, 광양 등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국군 3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문성환은 2대대 중화기 중대 박격포 소대장으로 훌륭히 제 소임을 다하였다.

전투 도중 포로로 잡힌 재일학도의용군들도 있었다. 공산군에서 생포되어 북에서 억류생활을 하던 박종호와 차용문은 휴전과 함께 실시된 포로교환으로 겨우 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들이 그곳에서 겪은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또 전투에 참가한 재일학도의용군 중에는 많은 전상자가 발생했는데, 특히 홍기성은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당했으며 최덕호는 안면에 관통상을 입어 일생동안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야만 했다. 또한 낙타고지 전투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자 전사한 전우의 화염방사기를 대신 메고 아군의 공격을 방해하던 기관총좌를 단숨에 박살내 버린 무명의 재일학도의용군도 있었다. 그는 고지로 단신 돌격하여 이와 같은 전과를 이루어냈지만 정작 자신은 살아서 고지를 내려오지 못했다. 자신의 온몸을 던져 아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그 모습은 당시 함께 전투에 참가했던 옛 전우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처럼 재일학도의용군은 전쟁터 곳곳을 누비며 자신의 인생과 목숨을 불살랐고, 서툰 한국말과 낯선 환경,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지금까지 소개한 재일학도의용군 외에도 화염방사기를 매고 적진에 뛰어들었던 무명의 용사처럼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그들의 희생으로 인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김교인 외(2002), 재일동포 6·25전쟁 참전사,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온창일 외(2010), 6·25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재일동포모국공적조사위원회(2008), 모국을 향한 재일동포의 100년 족적, 재외동포재단.

전쟁기념사업회(1992), 한국전쟁사 제4권 낙동강에서 압록강으로, 행림출판.

경향신문 1983년 6월 24일자 기사.

매일경제신문 2002년 6월 27일자 기사.

신동아 2010년 1월 1일 통권 6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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