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에 편입되어 전투에 참가했던 재일학도의용군 중 일부는 1951년 초부터 부상이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제대를 하기 시작했다. 미군에 배속되어 참전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재일학도의용군의 제대 절차는 전쟁 중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또한 상당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으로의 귀환을 보장받지 못한 채 복무를 계속해야만 했다.
따라서 제대 이후 한국에 생활의 터전이 없었던 대부분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당장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난처한 입장에 처한 이들을 위해 관계 당국은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임시로 머물 장소로 부산 초량동에 위치하고 있던 소림사라는 절을 소개했다. 이 절은 해방 후 국내에서 잔류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임시로 거처하던 일본인 귀환자 대기소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소림사에는 일본인 귀환자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거주하고 있었다. 비록 이들과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재일학도의용군들도 귀환할 날을 기다리면서 소림사에 머물게 된 것이다.
처음에 모인 의용군의 숫자는 10여 명이었으나 부산 시내를 헤매고 있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속속 모여들어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하자 이들은 본격적으로 관계 당국과 귀환 문제를 교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국방부 차관이었던 김일환 씨가 소림사를 방문하여 귀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해주었고, 그 후 미군과 당국의 협조를 받아 일본으로 돌아갈 길이 열리게 되었다.
소림사에 있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전국에 있는 동지들에게 알리기 위해 신문공고를 내기로 했다. 비록 얼굴도 서로 잘 모르는 사이지만 같은 뜻으로 조국전선에 참전한 동지들을 내버려 두고 자신들만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일학도의용군들에게 알림! 일본으로 귀환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 글을 보는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즉시 부산 소림사로 집결할 것.”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재일학도의용군 중에서 광고를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소림사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 광고를 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드디어 1951년 10월 2일 1차로 40여 명이 일본으로 귀환하기에 이르렀다. 부산항을 출발하여 사세보항에 도착한 그들은 미군 전용열차 편으로 도쿄로 이동하였고 기차역에서 동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2년 2월, 26명을 끝으로 재일학도의용군의 귀환길은 막혀버렸다. 바로 1951년 9월 8일 서명되어 1952년 4월 28일 발효된 미국과 일본 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Treaty of San Francisco)의 영향이었다.
이 조약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공식적인 종전이 선언되고 국권을 회복한 일본은 재일학도의용군에 대해 ‘일본의 허가를 받지 않고 임의 출국한 자들’로 규정하고 일본 입국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의용군들은 모두 242명이었다. 이 문제는 한·일 양국이 외교적으로 풀어야 할 부분이었으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결국 해결되지 못한 채, 재일학도의용군 청년들은 현해탄을 두고 가족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서의 삶에 적응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던 재일학도의용군들에게 또다시 국가를 위해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바로 ‘북송저지공작대’의 임무였다. 6·25전쟁 후 북한은 수많은 사상자와 남한으로 귀화한 인구로 인해 노동력 부족을 겪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재일동포들에게 북한으로의 귀국, 즉 북송을 제의하는 대대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1959년 8월 13일 인도 캘커타에서 일본 적십자사와 북한 적십자사 대표 간 체결된 협정에 의해 본격화된 재일동포 북송은 그 해 12월 14일 니가다항에서 975명이 북한으로 떠난 것을 시작으로 1967년 11월 12일 협정이 폐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로써 총 155차에 걸쳐 모두 8만 8천명이 넘는 재일동포가 일본을 떠나 북한으로 갔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1959년 경 한국에서는 북송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자유당 정부는 일본 정부에 강력 항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거주지 선택의 자유’라는 원칙을 내세웠고 결국 정부는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이와 같은 정황 속에 대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자유당 정부는 북송을 저지할 공작대를 일본에 파견할 계획을 세우게 되고, 일본어와 일본 사정에 능통한 재일학도의용군들에게 참가 제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 재일학도의용군 박덕철 씨 인터뷰 중에서 -
북한산 아지트에서 교육을 마치고 난 북송저지공작대 2,3소대
북송을 저지하기 위한 한국의 특수임무 공작대가 일본에 침투했다는 내용의 일본기사
이들은 조국을 위해 한 번 더 일하자는 결의와 혹시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공작대에 참가하게 되었다.
심사를 거쳐 재일학도의용군 41명, 경찰간부시험 합격자 24명, 예비역 장교 1명 등 총 66명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1959년 9월 약 2개월 정도의 특수공작 교육 후 곧장 일본으로 투입되어, 일본의 고쿠라, 고베, 구레 등지로 잠입하여 북송저지 활동을 벌였다. 그 와중에 일부 대원들은 배가 침몰하는 사고로 숨지기도 하였고 시모노세키에서 철수 도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감옥에서 실형을 살기도 한다.
이렇게 온갖 고초 겪은 이들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6월 20일경 일본에서 추방되어 겨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이들에게는 출발하기 전 자유당 정부가 약속한 경찰 특채도,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더구나 순직한 이들의 유가족에게는 사망통보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가가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응했던 북송저지공작대 활동은 그렇게 재일학도의용군들에게 상처와 아픔만 남기고 끝이 났다. 아직도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북송저지공작대는 역사적·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희생해야만 했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의 기구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남은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은 2009년 5월이 되어서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재일동포 북송저지 국가임무수행 순직영령 위령제’를 거행하여 이들의 안타까운 넋을 달랠 수가 있었다.
1960년 봄 제2공화국이 수립될 무렵 그때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남아있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일본으로의 귀환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1951년부터 창립된 재일한교학도의용대는 이와 같은 정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우선적으로 의용군들의 자립 대책을 논의하였고, 일가친척 하나 없이 오갈 데 없는 동지들을 위해 정부에 끊임없이 간청을 하였다. 이와 같은 부단한 노력 끝에 정부는 재일학도의용군들의 공적을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군사원호법에 의해 이들에게 한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미군부대 경비원 등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아있는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실종되거나 전사한 동지들의 넋을 달래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대부분 20대였던 이들은 제사를 지내 줄 자식마저 없는 상태였다. 먼저 간 동지들을 위한 위령제를 열어주고자 동분서주하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드디어 1961년 4월 10일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합동위령제를 거행하여 고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릴 수 있었다.
먼저 간 동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치러진 재일학도의용군
전사자 합동위령제(1961년 4월 10일 부산 용두산 공원)
이후 재일한교학도의용대는 1965년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를 설립하여 계속해서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취업을 위해 힘쓰고 이들의 공로를 알리기 위해 힘썼다. 이러한 결과로 1967년 1월 18일 정부는 신원이 확인된 재일학도의용군 317명에게 6·25전쟁에 참전하여 조국을 수호한 공적을 치하하는 방위포장을 수여하였고, 1968년 6월 20일에는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한다는 법조항을 신설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가족과 자식들 앞에 떳떳한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 돌아간 재일학도의용군들은 6·25전쟁에서 전사한 후 일본으로 송환되어 도쿄 대행사에 보관되어 있던 51명 동지들의 유골이 조국 땅에 묻힐 수 있도록 계속해서 호소하였다. 결국 1963년 11월 8일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 51구가 한국으로 송환되어 국립현충원 제16묘역에 안장될 수 있었다.
일본에 임시안치 된 지 10년 만에 조국으로 송환되고 있는 재일학도의용군 51명의 유해(1963년 11월 서울 여의도공항)
또한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에서는 1976년 초부터 조국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동지들의 충혼을 추도하고 이들의 정신을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뜻을 모아 참전기념비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지회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각계각층의 도움으로 1979년 드디어 인천 수봉공원에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동지회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1993년 3월 24일에는 원산·이원 상륙작전에 참전했다가 철수 도중 실종된 83명의 재일학도의용군 동지들이 전사자로 확정되어 그들의 위패가 국립현충원에 봉안될 수 있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동지들의 넋이 편히 쉴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어 1997년 6월 30일에는 1967년 당시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방위포장을 수여하지 못했던 54명이 추가로 포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전쟁이 끝난 후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고난을 함께 했던 동지들을 보살피며 먼저 떠난 이들의 넋을 기리면서 그렇게 조국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재일학도의용군들의 기억에서도 아득해져 버린 과거의 이야기들, 이제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