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서를 제출한 재일동포 청년들 중 신체검사와 심사과정을 거쳐 최종 선발된 인원은 총 642명이었다. 이들은 미군의 사전 계획대로 각 지방별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몇 차례로 나누어 출발하게 된다.
가장 먼저 소집 명령이 떨어진 곳은 도쿄였다. 1950년 9월 8일 이른 아침 도쿄 스루가다이 호텔에서는 드디어 조국전선으로 참전하는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을 위한 출정식이 거행되었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려는 가족들과 그들을 환송하기 위해 나온 동포들은 안타까운 이별의 순간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이 키운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부모님들은 애써 안타까운 눈물을 삼켰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한 채 다만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원할 뿐이었다.
출정식이 끝나자 자원병들을 인솔해 가기 위해 도착해 있던 미 제8군 보충훈련소 키엘 대령의 승차명령이 떨어졌다. 청년들이 트럭에 오르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대한민국 만세!”라는 외침이 울렸고 지원병들은 ‘건국행진곡’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스스로의 각오를 다졌다.
스루가다이 호텔 앞에서 거행된 재일학도의용군 1진의 환송식.
중앙에 서서 연설을 하고 있는 사람이 당시 대한민국주일대표부 김용주 공사이다.
재일학도의용군의 군복 견장에 박혀있던
S.V. FROM JAPAN 견장
1진에 속한 78명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캠프 드레이크라고 불리는 일본 아사카 기지의 미 8군 보충훈련소에 입소하였다. 그리고 4일 후인 1950년 9월 12일 요코하마항에 도착해 대기 중이던 미군 전투부대원 1,500명과 함께 군용 수송선 피닉스 호에 승선하게 된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미 제7사단에 배속되었으나 군번과 계급이 부여되지 않았고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승선하였다. 군인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는 견장에 쓰인 ‘S.V.(Student Volunteer) FROM JAPAN’이라는 문구가 유일했다.
수송선이 인천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9월 16일 오후 무렵이었다. 다음날인 17일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미 해병대와 함께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이 조국전선에서 치러낸 첫 번째 전투는 후일 세계전쟁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반격작전으로 꼽히는 인천상륙작전이었다. 피닉스 호에서 옮겨 탄 상륙용 보트가 육지에 닿자 재일학도의용군들의 가슴에는 희비가 교차하였다.
미군 장병들과 함께 조국 땅에 첫발을 내딛는
재일학도의용군
- 재일학도의용군 1진 이활남 씨 회고록 중에서 -
전쟁으로 인해 잿더미로 변한 조국의 모습을 지켜보는 재일학도의용군 청년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땅을 밟았다는 감격스러움과 그런 조국이 폐허가 된 모습에서 오는 안타까움은 그들의 각오를 더욱더 단단하게 했다. 이렇게 1진이 성공적으로 인천에 첫발을 내딛은 후 일본 전역의 청년 지원병들은 본격적으로 6·25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오사카, 도쿄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서 자원한 청년들로 구성된 재일학도의용군 2진 266명은 1진과 같은 절차를 거쳐 9월 11일 도쿄에 결집하여 아사카 캠프 드레이크로 입소한 후, 9월 19일 요코스카항에서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이들은 9월 24일 인천 올림푸스 호텔 주변 해변가에 상륙하였고 이후 송림초등학교로 이동하여 미군의 각 부대에 배속되어 후방지원 업무에 투입되었다.
와카야마현 자원병들의 출정식 기념사진
재일학도의용군 3진 101명 역시 9월 28일 1, 2진이 거쳐 갔던 아사카 부대에 입소한 후, 9월 30일 요코하마항을 출발했다. 이들은 10월 5일 인천항에 도착한 뒤 곧바로 경기도 이천으로 이동하여 미 제7사단에 배속되었다. 후에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에 뒤이은 동해안의 원산·이원상륙작전과 북진에 참가한다. 그러나 이들이 속한 미 제7사단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바뀌자 엄청난 손실을 겪으며 후퇴해야 했고, 그러는 와중에 재일학도의용군 83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때까지 군번도 받지 못한 채 전투를 치르던 이들은 대부분 시체도 거두지 못하고 실종처리 되었다. 이들 실종자 83명은 1992년에 이르러서야 11월 19일자로 육군본부에 의해 전사자로 확정되었다.
교토 자원병들의 출정식 기념사진
가나가와현 자원병들의 출정식 기념사진
재일학도의용군 4진의 경우는 초기 출전한 의용군과는 달리 체계적인 훈련을 마치고 건너온 의용군들이었다. 주로 규슈 지방 출신으로 구성된 재일학도의용군 52명은 오이타현 벳부의 캠프 모리라고 불리던 미 제8068보충대대에 9월 18일 입소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황이 호전된 탓인지 이들은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45일 동안의 훈련 후 카투사 고유군번인 ‘K-1138301’에서 ’K-1138352’까지의 군번을 정식으로 부여받았다. 훗날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산화한 박두원 대위도 여기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11월 10일 고쿠라항을 떠나 동해안의 원산상륙작전에 투입되었고, 이원, 장진호 등의 주요 전투에 참여하였다.
4진보다 약 한달 뒤 캠프 모리에 입소한 5진은 규슈 지방 자원병 14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입소 다음날인 10월 15일 바로 나가사키현 사세보항을 출발하여 18일 한국으로 건너온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부산으로서, 다른 의용군과는 달리 미군이 아닌 국군에 인계되어 당시 부산진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국군 제2훈련소에 입소한다. 훈련을 끝낸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이후 국군 제9사단으로 배속되어 국군으로서 백마고지전투와 금화전투 등에 참전하면서 재일학도의용군의 기개를 널리 떨친다.
인천에 상륙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당시 경기도 부평에 자리 잡은 미 제3병참기지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전선으로 투입되기 위해 거쳐야 할 본격적인 군사훈련이 아니라 순찰 및 수송과 같은 후방지원 업무였다. 후방부대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당장 최전선으로 나가 나라를 위해 싸우기를 바라던 혈기왕성한 청년들은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미군 측에 줄기차게 전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이들의 요구를 쉽사리 수락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계급과 군번마저 주어지지 않은 ‘군인 아닌 군인’의 신분으로서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실망감과 불만은 커져만 갔다.
마침 이들의 안타까운 처지에 관심을 표하던 미 제422보병연대의 일본인 2세 지미 고자와 중위에게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도움을 요청했다. 고자와 중위는 제대로 된 훈련을 받기만 하면 누구보다 굳은 결의와 단결력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재일학도의용군들에게 단일부대를 설립해주자고 상관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3·1독립보병대대를 격찬하는 내용의 캘리포니아 결의안
특히 그는 조지 스튜어트 사령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재일학도의용군은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이들만의 단일부대를 만들어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이 미군에게도 여러모로 유용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건의가 타당하다고 판단한 스튜어트 장군은 결국 단일부대 창설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임시 편성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은 해산명령에 동의할 수 없다며 저항했으나 미군의 입장은 단호했고, 대대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해체 절차를 밟았다. 미군의 공식 편제표에도 없이 임시로 편성된 3·1독립보병대대는 부대의 해산과 함께 사라졌고 휴전 후 수없이 발간된 전쟁사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부대 창설의 역사와 감동은 오로지 재일학도의용군들의 가슴 속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3·1독립보병대대의 지휘관이었던 고자와 중위는 3·1독립보병대대와 이들의 정신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계속 안타까워했다. 결국 그는 1977년 2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의 샘 하야카와 상원 의원에게 편지를 보내 재일학도의용군과 3·1독립보병대대에 관한 사실을 알리고 이들에게 감사장을 수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몇 달 뒤 1977년 5월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지미 고자와 예비역 중령과 3·1독립보병대대에 대해 격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이들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비록 너무나 뒤늦은 후에 이루어진 처사였지만 3·1독립보병대대의 나라사랑 정신은 이렇게 세상에 인정받게 되었다.
3·1독립보병대대 해산 후 재일학도의용군에게는 미군부대에 남든지 아니면 한국군으로 편입하든지 양자택일하라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한국군 편입을 원했던 일부 재일학도의용군은 육군본부와 교섭을 가진 끝에 한국군 입대를 정식으로 허락받고 1950년 11월 28일 당시 서울 남산초등학교에 자리 잡은 육군 제1보충대대에 입소했다. 한국군에서의 생활도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군이 되어 적과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이 모든 어려움을 견디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이들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는데, 바로 육군본부에서 간부후보생 선발시험 응시 기회를 준 것이었다. 당시 국군은 위관급 초급장교의 극심한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학력이 높은 사람이 많은 재일학도의용군들에게 이와 같은 제안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험을 본 결과 26명이 합격하여 당시 부산 동래에 자리 잡았던 육군종합학교로 입교했고 나머지 대원들은 하사관이나 사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였다.
1951년 1월 14일 22기로 입교를 허락받은 재일학도의용군들은 그곳에서 미군부대 근무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늦게 입교한 7명이 더 합류하여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후 8주 동안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3월 10일 드디어 22기의 졸업식 및 임관식이 치러졌다. 보통 간부후보생들의 가족들이 참가하여 임관을 축하하며 계급장을 달아주지만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서로의 어깨에 교대로 계급장을 달아주며 축하해 주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었다. 이때 부상이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훈련을 끝마치지 못한 사람을 제외하고 소위로 임관한 사람은 총 24명이었다.
육군종합학교 22기로 입교하는 재일학도의용군 간부후보생들
한편 재일학도의용군의 한국군 편입에 대한 사실을 모른 채 미군부대에 남아 있던 일부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미군부대에서 계속 근무를 하다가, 1950년 12월 17일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인천에서 미 해군 함정에 승선했다. 군산이나 목포에 도착할 것을 예상했던 이들은 이튿날 함정이 일본 항구에 닻을 내린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일본에 도착한 후 미군 측은 재일학도의용군에게 일방적으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미군에게 격렬하게 항의하고 애원도 해봤으나 소용이 없자 청년들은 당장 도쿄로 달려가 민단 중앙본부와 주일대표부를 차례로 방문하여 대책을 요구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58명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두 달 뒤인 1951년 2월 13일 요코하마항에서 한국해운공사 화물선을 타고 현해탄을 다시 건넜다. 부산에 도착한 이들은 2월 23일 부산 범일동의 국군 제2훈련소에 입소했다. 이후 제2훈련소가 육군하사관학교로 바뀌면서 이들도 모두 하사관 교육을 받았다. 이들 중 이규달, 박청남, 박연규 등은 일본 항공대에서 복무한 경력을 살려 육군항공대 창설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