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국(이집트-시리아-요르단) 사이에 일명 ‘6일전쟁’이라고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단 6일 만에 자신보다 40배나 큰 아랍제국들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사실만큼 유명한 사실은 해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국민의 참전이었다. 전쟁이 임박하자 이스라엘의 국방장관 모세 다얀은 방송에 출연하여 조국을 위해 싸울 지원병이 필요하다며 호소했고 이 한마디에 재외 이스라엘인들은 앞다투어 조국전선으로 달려갔다. 뉴욕공항에서 배낭을 메고 예루살렘행 귀국 티켓을 끊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모습은 ‘세계 최초의 재외국민 참전’이라며 세계인과 미국언론들의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 재외국민 참전의 원조는 대한민국이다. 6·25전쟁에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이스라엘보다 무려 17년이나 앞서 조국을 위해 타국 땅에서 스스로 참전을 자처했다. 이 소식을 가장 먼저 타전한 언론 또한 미국언론이었다.
1952년 9월 29일 미국의 메이저 방송사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는 당시 재일의용군들의 참전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렸다. 당시 도쿄지국장이었던 조지 하먼 씨가 ‘한국전쟁에 출현한 유령부대’라는 타이틀로 한 리포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유령부대가 한국전쟁에 나타나 UN군과 함께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정체는 일본에서 온 한국인들입니다. 도쿄의 유엔군 사령부는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산과 수원에 파견된 CBS 특파원들은 유령부대가 국적불명의 동양인들로 편성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특파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유령부대원들은 일본에서 자라거나 일본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한국인들입니다.”
미국 기자의 눈에 비친 재일학도의용군의 모습은 국적도, 소속도 불분명하여 마치 ‘유령’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서도 재일학도의용군 젊은이들은 3년 1개월간 전장을 누비며 오로지 조국만을 생각했다. 그들은 단 6일 만에 끝난 중동 전쟁에 비할 바 되지 않는 오랜 기간 동안 참혹한 6·25전쟁의 현장 곳곳을 누비며 스스로에게도 낯설기만 한 조국을 위해 젊은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6·25전쟁 참전을 자원한 재일동포 다수는 일본에서 대학이나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로서 졸업 후 출세가 보장되는 엘리트층이자 안정적인 신분이었다. 문맹률이 80%가 넘던 당시 자식을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만 진학시켜도 충분하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던 안호상 박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일본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참전하겠다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재일동포 청년들은 미군 극동사령부 맥아더 장군에게 참전시켜 달라고 청원하는 열성을 보였다. 문제는 지원자 대부분이 대학생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느냐 또 돌아온다면 복학이 가능하겠는가 그들은 이런 현실 난관들에 대한 어떤 보장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국전선으로 향했다.”
사실 해외거주자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자동 유예되고 있었으므로 참전하지 않아도 무방했고 일본 생활에 지장이 생긴 것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에서의 안정적인 현재와 창창한 미래를 접고 과감하게 대학 배지를 던져버렸다. 그들이 이렇게 주저 없이 전선으로 달려 나간 이유는 나라를 잃는 고통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비록 건국한 지 2년밖에 안된 신생국(대한민국의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지만 자신들이 지켜야할 조국은 오로지 대한민국이라고 확신했다.
- 재일학도의용군 송동원 씨의 인터뷰 중에서 -
- 재일학도의용군 유승호 씨의 인터뷰 중에서 -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치열했던 6·25전쟁 곳곳을 누볐다. 일본에 살던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조국이지만 외국이나 다름없는 낯선 곳이었다. 그들은 우리말이 서툴러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일본인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들은 아군이 처음으로 주도권을 잡은 인천상륙작전, 9·28 서울수복, 원산상륙작전 외에 수많은 북진작전, 그리고 중공군의 인해 전술로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 했던 1·4 후퇴와 흥남철수작전, 6·25전쟁 최대 격전장이었던 중부전선의 백마고지와 김일성고지, 금화지구 전투 현장에 어김없이 있었다.
그렇게 참전한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 중 52명은 전사하였고 83명은 전투 도중 행방불명되어 총 135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재일의용군의 운명도 순탄하지는 못하여 265명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나머지 242명은 그러지 못했다. 혈혈단신 한국에 남게 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연고도 없고 한국말도 서투른 상태에서 일자리와 거처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가족들과 생이별해야 하는 고통이 이들을 가장 힘들게 했다.
뒤늦게 국가에서 이들의 공적을 인정하여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주었으나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삶은 고스란히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가족, 목숨까지 모든 것을 희생했고, 이러한 희생은 모두 그렇게도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숨 쉬고 있는 우리가 그들을 영원히 기억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김교인 외(2002), 재일동포 6·25전쟁 참전사,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온창일 외(2010), 6·25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재일동포모국공적조사위원회(2008), 모국을 향한 재일동포의 100년 족적, 재외동포재단.
전쟁기념사업회(1992), 한국전쟁사 제4권 낙동강에서 압록강으로, 행림출판.
경향신문 1983년 6월 24일자 기사.
매일경제신문 2002년 6월 27일자 기사.
신동아 2010년 1월 1일 통권 6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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